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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20. 2020

나의 아침이 당신의 저녁이 된다는 건

북위 78도 지점에 있는 노르웨이의 롱위에아르뷔엔에서는, 4월 말에 뜬 해가 거의 8월 말까지 지평선에 걸쳐 있고, 심지어 8월 말이 되어도 해는 잠깐 졌다가 몇 분 후에 다시 떠오른다. 그곳의 겨울밤도 여름 낮만큼이나 길게 이어지는데, 10월 말에 시작해서 다음 해 2월 중순까지가 계속 밤이다. 우리에게 정상이고 일상인, 24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낮과 밤의 순환이 그곳에는 없다. 오직 1000시간쯤 계속되는 긴 낮과 긴 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깜빡거리듯 빠르게 변하는 낮과 밤만이 있을 뿐이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낮과 밤이 몇 시간이 아닌 몇 달 동안 이어지는 곳은 어떤 세상일까. 쉬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얀 밤이나 까만 낮을 내가 아는 밤이나 낮처럼 인식할 수 있을까.     


백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생소한 광경에 신기해하고 설레어하다가 이내 바깥의 빛을 애써 차단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대기업을 다니다 핀란드로 날아간 친구 역시 백야 얘기를 했었다. 한 번 가마, 하고 말만 하는 가운데 친구는 독일로 날아갔는데 그 후로도 나는 백야나 북유럽 따위의 단어가 나오면 습관처럼 이제는 그곳에 없는 친구를 떠올린다.




내가 새로운 땅에 별 탈 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건 한국과 똑같이 굴러가는 절기 덕분이었다. 봄이 가면 당연히 여름이 올 거라 기대하는 삶을 반복할 수 있었고 가벼운 여름옷이 지겨워질 무렵이면 두터운 겨울옷을 꺼내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이식된 삶으로 인한 우울함이나 혼란스러움이 가까스로 나를 피해 갔는지도 모른다.     


내가 두고 온 한국에서의 삶은 이곳에서도 반쯤은 나와 함께 굴러간다. 아침을 맞이하면서 한국은 잘 준비를 하겠거니 생각하고 저녁식사를 할 때쯤이면 한국은 이제 기상했겠구나, 생각한다.


이렇게 얽혀 있다 보니 우리의 밤은 쉬이 잠들지 못한다. 이곳에서도 이곳에서의 삶을 100퍼센트 살아가지 못하고 그곳의 삶을 생각하는 우리의 밤은 온전한 밤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산다는 건 사람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필요로 한다. 잘 살아내려면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가족이나 친구가 줄 수 없는 사람의 냄새나 살결의 부딪힘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당장 아이를 맡기고, 함께 수다를 나눌 수 있으며, 오늘의 반찬거리를 고민할 수 있는 이웃사촌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그리도 방황했나 보다.




그리워하려면 의지를 발휘해서 일부러 연락을 안 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연결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연락을 할 수 있는 시대라지만 시차라는 엄연한 경계는 나의 시간과 당신의 시간을 가로막는 장벽임에 분명하다.


나의 아침이 당신의 저녁이 된다는 사실, 내가 눈을 뜨면 당신은 잠들 시간이라는 사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도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이 자연의 섭리가 낯설다.


이곳에서의 하루를 잘 살아내더라도 가슴 한 구석에는 늘 메워지지 않는 작은 구멍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기분. 낯선 땅에서 산다는 건 그 구멍으로 많은 것을 내보내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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