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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27. 2020

삼시세끼 식탁을 차리는 일

2017년, 한국을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오던 날, 내가 마지막으로 먹은 점심은 떡볶이였다.


뭘 먹고 싶냐는 부모님의 질문에 막내딸은 동네 떡볶이를 외쳤고 그리하여 벌건 대낮에 나이 든 부부와 젊은 부부, 그리고 만 2살짜리 아이가 동네 작은 테이블에 앉아 떡볶이를 먹는, 흔치 않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나에게 떡볶이는 소울 푸드다. 요조가 <아무튼, 떡볶이>에서 “맛없는 떡볶이집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좋다”라고 밝힌 것처럼 나 역시 떡볶이가 맛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집에서 해주는 떡볶이는 늘 너무 건강식이었다. 당근에 양파는 물론 파! 까지. 당시에는 떡볶이 찌개를 만들어버린 엄마를 원망했었는데, 엄마가 되어 보니 과거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별 영양가 없는 탄수화물 덩어리에 어떻게 해서든 영양을 추가해보고자 하는, 자식새끼에게 더 좋은 것만 먹이려는 어미의 간절한 마음이었음을. 하지만 그때의 철부지 내가 그랬듯, 우리 아이들도 간장 떡볶이에 넣은 고기나 야채 따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떡만 날름 골라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가 아니라, 남편이 좋아하는 고기, 아이가 좋아하는 소시지를 차려내야 하는 엄마가 된 나는, 해외에서 가족을 위한 식탁을 차려내면서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오랜 세월, 가족을 위해 상을 차렸을까. 당연한 일이 아니건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을 거다. 그렇지 않고는 그 긴 시간 동안 매일같이 엇비슷한 노동을 묵묵히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삼시세끼 식탁을 차린다는 건 썰고 볶고 굽고 삶고 찌는 육체노동이자, 영양을 고려한 식단을 구성하되 매끼 식사 메뉴가 겹치지 않도록 창의력까지 발휘해야 하는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엄마는 어떻게 매 끼 새로운 식사를 준비했을까. 엄마가 되어 가족을 위한 식탁을 차려내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까지도 따뜻한 찌개를 늘 아침상에 올렸던 엄마 생각이 나면 지금도 아련해진다. 해도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새벽, 내 아침밥을 차린다고 부엌을 서성이는 엄마의 실루엣, 그 안에는 늦었다고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했던 철부지 딸의 모습도 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엄마의 따뜻한 밥상 속에서 밥심을 쌓은 덕분에 내가 머나먼 타지에서 이렇게 또 누군가를 먹이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자라면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의 양도 그에 비례해 풍부해질 거다. 그렇게 풍부해진 밥상은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소박해질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떠난 집에서 남편과 내가 둘만을 위해 차린 소박한 밥상을 놓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나의 밥상은, 내가 차려내는 식탁은 어떠한 옷을 입고 가족들을 맞이할지, 가족들은 그 식탁을 나만큼이나 기억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엄마처럼 그렇게 화려한 밥상을 내어놓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따뜻한 밥상을 둘러싸고 가족 모두 든든한 여러 끼를 먹었다고, 아이들의 기억 언저리에 그런 잔상이라도 남으면 그걸로 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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