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권리

프리랜서의 권리

by 물고기자리

프리랜서가 하고 싶은 일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프리랜서의 특성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자신의 주 분야에서 조금 가지치기를 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준의 일인지를 잘 판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보통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모, 비슷한 일 아니겠어하며 덤벼들었다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는 상황에 당황하기도 하고 덥석 일을 맡은 걸 후회하기도 한다.


일을 의뢰한 상대가 어떠한 사람인지도 중요한데 이와 관련해 나는 작년부터 '특이한' 클라이언트 때문에 고생 중이다.




누군가의 소개를 받았다던 그 클라이언트는 미국에 30대 초반에 이민 온 부모님 나이 벌의 남성이었다.


영어로 작성한 본인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한국 시장에 내놓고 싶어 한 그 남성은 첫 통화에서도 "여성의 본분은 아이를 낳는 거"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하지 못해 나를 내내 불편하게 했다.


그것만이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그 클라이언트는 일에 있어서도 수위를 조절하지 못했다.


나에게 번역만이 아니라 반복적인 글 다듬기에 아예 창작까지 요구했으며 자신의 욕심으로 한글본과는 많이 달라진 원문에 영어로 내용을 채워 넣어 달라고까지 했다. 마지막 부분은 내가 거절했지만 어쨌든 그 모든 과정을 책 한 권 정도의 혹은 그보다 적은 번역료로 진행하고자 했다.


애초에 그 사람 말을 믿고 처음부터 계약서를 쓰지 않은 나의 잘못도 있었지만 시간당 계산해서 주겠다는 허황된 말은 말 그대로 허황된 말로 끝났고 이미 어느 정도 번역을 진행하고 있었던 나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 금액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시 빨리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기만을 기다리며 그럭저럭 버티던 어느 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메일을 받은 나는 그동안 쌓아온 분노를 그러모아 강력한 한 방의 메일을 보냈다. 업무 관련해서는 이 메일로만 연락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담아.


그 메일 이후 답 메일과 애매모호한 카톡 메시지를 받은 후 나는 왜 진즉에 경계를 확실히 세우지 않고 이리저리 끌려다녔을까 하는 마음에 속이 후련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찜찜한 마음도 금할 수 없었다.


당사자가 나서서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 갑과 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남성보다 어린 여성이라는 이유로 들어야 했던 온갖 부조리한 발언들. 회사를 그만두고 비로소 그런 위계질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모순적인 행동과 말들에 혹사당한 경험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을인 우리가 왜 입을 열고 자신의 입장을 말해야 하는지. 상대를 공격하는 게 아닌 정당한 주장을 하는 것뿐인데도 그게 나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프리랜서들에게 왜 그렇게 힘든 건지.


그동안 젠틀한 에이전시나 출판사들과 거래해온 나는 어쩜 이 땅의 프리랜서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아픔을 뒤늦게 겪은 건지도 몰랐다.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No!라고 외치지 못하고 어영부영 맡기는 했지만 조건 따위가 썩 내키지는 않는 일을 차별적인 환경 속에서 하고 있을 프리랜서들이 얼마나 많을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권리. 그건 안정적인 보수는커녕 4대 보험도 제공받지 못하는 프리랜서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리인지도 모른다.


이 땅의 수많은 프리랜서가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완충 장치를 제공하는 사회를 희망한다. 하기 싫고 부담스러운 일을 빼 사적인 서점이라는 성공적인 컨셉을 일권낸 정지혜 작가 같은 사례가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프리랜서가 된다는 건 나 스스로를 지키는 보초병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나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서는 쓸쓸한 보초병이기는 하지만 그건 싫은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좀 멋있다고 본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의 경계를 잡고 그 방어선을 지키는 일. 이제부터라도 그 일에 소홀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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