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시절이다. 그 시절의 한 복판에 페미니즘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놓여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또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 거대한 물결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 스스로가 5년 간의 대기업 생활 속에서 젊은 여직원으로 무수한 사건을 겪어 낸 몸이었다.
회식 자리에는 꼭 젊은 여직원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여직원들의 외모 혹은 복장 품평, 모델하우스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 등등 건설회사는 지금 돌아보면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온갖 문제의 온상이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드라마를 보면 내가 회사를 그만둔 지 10년이 넘는 지금조차 기업 내 젊은 여성의 자리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해 씁쓸하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거대한 담론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서 소리를 내는 개인의 서사가 지닌 힘도 그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페미니즘'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업고 소개되는 글들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정작 개인이 실제 생활에서 어떠한 취사선택을 해야 할지, 나의 이야기를, 목소리를 어떻게 내야 할지 실질적인 가르침을 제시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현실이 닥쳤을 때 평소의 생각과 말을 행동과 얼마나 일치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자꾸 소리 내어 누군가와 이야기해보는 일상이 중요한 이유다. 요새는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에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한 번 더 뒤돌아보곤 한다. 내 머릿속 생각과 태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 사이의 간극을 느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특정한 틀 안에 갇힌 채 살았나 놀라기도 한다.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엘더 밀레니얼'인 나는 90년대생이나 2000년대 생에 비해 그 전 세대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나의 수준에 맞는, 그러니까 너무 급진적이지 않되 나의 생각을 하나씩 정립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친절한 페미니즘서가 필요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미래가 될 테니까》를 쓴 윤이나를 통해 그녀가 황효진과 함께 쓴 두 권의 독립서적물,《여자들은 먼저 미래로 간다》, 《여자들은 함께 미래로 간다》를 만났을 때 내가 그토록 반가웠던 이유다.
평범한 여성들의 접근을 막는 거대한 담론이 아닌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접근한 것이 나의 입맛에 딱 맞았다. 여성 서사에 관심이 많아진 요즘의 내가 그토록 갈망한 시원한 물줄기였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하며 무비판적으로 기사를 썼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대중문화를 그린다. 남성들이 짜 놓은 판에서 밀려 결국 밖에서 판을 짜야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이야기, 남성들만 등장하는 뻔한 서사가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도 흥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관객들의 힘, 그리고 소신 있게 행동하기 시작한 몇몇 배우들에 대한 소개를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이 책은 제대로 바라보고 읽는 법을 가르쳐 주지만 정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그동안 보지 못한 어떠한 길을 보았다. "그까짓 예능이, 영화가, 드라마가, K-pop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 책에서 "여성의 삶을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여성에게 더 집중해서 말하는 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페미니즘이 남성에 대한 공격이 아니듯 이 책 역시 남성을 배제하고 여자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너무나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을 조금은 바로 세워 결국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잘 살아보자는 얘기일 거다. 저자의 말처럼 “변하지 않는 세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여성들은, 과거에 머무는 이들의 눈에는 미래에 사는 것일” 테다. "더 나은 삶과 미래는 그곳에 살기로 결정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라면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미래로 가고 싶다.
이 두 여성은 <시스터후드>라는 팟캐스트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 팟캐스트 자체는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구조라고 한다. 후원 이외에는 아무런 수입도 없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생산적인 콘텐츠를 이 세상에 내놓고 있는 그녀들이 정말이지 너무 고맙다.
그래도 바라건대 그녀들이 건전한 콘텐츠가 더 많이 쏟아낼 수 있도록 수익 발생 모델이 정립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엇을 봐야 할지, 어떻게 봐야 할지 아직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길을 밝혀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같은 사람도 언젠가 누군가를 끌고 미래로 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