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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l 07. 2020

내가 번역하는 책에 내가 번역한 책이 인용될 확률은

내가 번역하는 책에 내가 번역한 책이 인용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지극히 낮지 않을까 싶다. 그 낮은 확률이 나에게 찾아왔다.


번역한 책의 권수가 그리 많지 않은 나에게(서른다섯 권 정도 되려나... 요새는 안 세어봐서 잘 모르겠다) 그런 기묘한 사건이 일어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번역한 문장을 인용문이랍시고 다시 적어 넣으면서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돈이 안 된다면 이런 자부심이라도 주섬주섬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번역 중인 책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우산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래서 문학 작품이 정말이지 많이 등장한다. 역서가 없던 초반 부분과는 달리 뒤로 갈수록 번역서가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이 많아져 일일이 찾아보느라 정말 미칠 지경이다.


밀리의 서재 같은 대여 사이트를 먼저 살펴보고 없으면 바로 알라딘이나 교보문고 등을 검색한다. 단 몇 줄의 인용을 위해 몇 권의 책을 전자책으로 구입한 건지. 나의 피 같은 돈이 얼마 되지도 않은 번역료에서 빠져나가는 것이기에 한 권이라도 덜 살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한 일인데 그 와중에 내가 번역한 책이 떡하니 나타나니(아. 처음부터 다 안 읽고 시작한 티가 너무 나네) 이중으로 반가울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 나에게는 없어서 다소 모양 빠지게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사진을 찍어 받기는 했지만 겸사겸사 엄마에게 자랑도 하고 그랬다.


내가 번역한 소설은 딱 2권이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와 《망각에 관한 일반론》. 그중 인용된 책은 후자다. 앙골라를 배경으로 하는 포르투갈 소설을 중역한 것인데 제목만 보고 소설인 줄 모르고 무슨 이론서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네, 소설입니다.  


그런데 몇 장 뒤로 가니 한강의 《채식주의자》까지 인용문으로 나온다. 내가 쓴 책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반가울 수밖에 없다. 우산이 등장하는 방대한 문학작품 중 추리느라 애를 먹었다는 저자의 말을 고려하면 최종적으로 책에 실린 작품들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 셈인데, 한국 작가의 작품이 그 영예의 자리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니 반갑지 아니할 수 없다.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영국인이라(이 책은 영국인이 쓴 책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생각해보니 내가 번역한  《망각에 관한 일반론》《채식주의자》와 마지막까지 맨부커상을 두고 경합했다고 했다. 저자가 해외 작품을 조금 넣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떠한 작품을 고를지 고민하다가 맨부커 수상작과 후보작을 넣은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그 많은 책 중 저 두 권이 들어간 건 아무래도 신기하다.




사실 저번 주부터 이사 때문에 싱숭생숭해 책이 잘 안 읽힌다. 식욕을 잃은 것처럼 독서 욕구를 잃었다고나 할까. 잔뜩 쌓아둔 책들 중 나의 책욕(?) 자극하는 책은 하나도 없다. 분명 너무 읽고 싶어 사들인 책들인데,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조차도 당황스러운 요즘이다.


이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집중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번역이다. 번역할 때에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내가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속세(?)의 고민도 잊고 집중하게 된다. 이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 3권의 책을 동시에 계약한 게 참으로 다행이지 싶다.


오늘의 에피소드 같은 사건에 기대어 약간의 활력을 끄집어 내보지만 아무래도 쉬이 고꾸라지기 쉬운 여름이다. 나의 일을 붙들고 있는 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여름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단 그것이라 하겠다. 부디 일이 나를 살리고 책욕도 부활시키기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데에서 삶의 에너지를 얻는 나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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