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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ug 29. 2020

돈이 많아도 나는 번역을 할 것인가

큰일이었다.


번역을 하다 보면 소소한 큰일이 많이 벌어진다. 불가사의한 음모세력 때문에 예전 파일이 새 파일을 잡아먹는다든지 하는 큰일 말이다. 결국은 시간을 다시 들여야 하는 일들이다. 이번 큰일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인용문이 이렇게 많은 책은 처음이었는데, 열심히 찾아서 다 넣었건만 출판사에서 해당 출판사와 협의가 안 되어 나더러 다시 번역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곱게 말해 속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월요일까지 해주겠다는 말에 에이전시 담당자는 양해해주셔서 감사하다 했다.


일개 번역가가 그것 말고 달리 어쩌겠는가. 다른 일에 지장이 안 가도록 최대한 빨리 해서 넘기는 수밖에. 그런데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흐미, 나의 아까운 시간들.




5개월 안에 다섯 권의 책을 작업하고 있다. 이사하는 가운데 그중 한 권을 탈고했고(문제의 그 책) 또 다른 한 권은 초고를 마무리하고 수정 작업 중이며 동시에 새로운 책을 번역하고 있다. 11월까지 2권을 더 진행해야 하는 지금, 번역가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나 바쁜 가운데 필연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돈이 충분히 많아도 나는 과연 번역을 할 것인가?


음, 돈이 얼마나 많다고 가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평생 흥청망청 써도 남을 만큼 많다면, 일단은 일을 좀 쉬고 싶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지난 8년 동안 쭉 달려왔으니(중간에 의도치 않게 쉬는 시간도 많았지만) 생계 걱정이 없다면 일단은 과감하게 스톱을 외쳐보고 싶다.


그다음에는 건물을 사야 하려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 같은 소시민은 그걸 불리지 않거나 정기적인 수입이 눈에 들어오는 게 보이지 않고서는 불안할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돈이 많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픈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 본다.


사실 번역 말고도 하고 싶은 일은 많다. 가령 가구 디자인을 하고 직접 만드는 일까지, 내 손으로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지금은 정신노동이 주인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단순 육체노동을 좋아한다. 돈만 된다면 하루 종일 봉투 붙이는 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도 아무런 불평 없이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번역은 나의 사랑이다. 아무런 불평 없이 인형 눈알을 붙이다가도 아차, 번역해야지 하고 8년 간의 관성이 나를 책상으로 잡아끌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정말 솔직히 말하면, 돈이 많아 번역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오더라도 난 번역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보다 일은 줄이고 공부 시간과 책 읽는 시간은 늘리고 돈보다는 나와의 궁합을 먼저 생각해 번역이라는 일을 하고 싶다.




돈이라는 변수를 제거하고 나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들이 보인다. 내년에는 부디 경제적인 벌이가 조금 나아져 돈보다는 나를 성장시키는 번역을 더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 말아먹어도 좋을 테니 자선 사업하는 셈 치고 뉴욕 한복판에 한국 서점을 운영해보고픈 바람도 있다.


생각만 해도 좋은 것, 그런 것이 많을수록 삶은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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