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일한다는 착각

by 물고기자리

5년 간의 촘촘한 조직 생활 끝에 몸도 마음도 지쳤을 무렵, 나의 간절한 소망은 혼자 일하는 거였다. 누구에게도 지시받지 않고 나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료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남은 평생 나의 과제라 생각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혼자서 일하는 생활을 한 결과 난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하는 일이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출판번역가는 여타 프리랜서들처럼 1인 기업가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지 않는 한 자신을 홍보해서 스스로 먹잇감을 물어와야 한다. 세금 신고도 혼자 해야 하고 일 자체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한다.


이것저것 바쁠 것 같지만 사실 번역가의 하루는 생각보다 조용히 흐른다. 하루에 정해진 시간만큼 일을 하고 내일 번역할 분량을 미리 읽어둔 뒤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낸다.


내가 가장 시끄러울 때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다. 이 시끄러움은 소리 없는 아우성과도 같아서 현실의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아 단내가 날 지경이 되어도 온라인 상의 나는 수다쟁이가 될 수 있다.


SNS는 소심한 사람들도, 그러니까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나를 홍보하는 일이 꺼려지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훌륭한 수단을 제공한다. 정말 획기적인 발명품 아닌가.


"혼자 하는 일이란 없다"라는 결론에 다다른 건 일을 하는 동안에는 온전히 혼자 일지 몰라도 나에게 일을 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일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자각이 있은 후였다.


내가 크리에이터처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번역가는 원 저자가, 그가 쓴 책이 없는 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직업이다. 따라서 내 손에 책 한 권이 의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원 저자를 비롯해 에이전시나 출판사 등 온갖 담당자들의 남모를 수고가 있었을 것이다.


새침하게 난 혼자서 일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스무 해의 폴짝>을 읽다가 김금희 인터뷰 중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요즘의 친밀감에 대한 인식은 다른 듯해요. 일간 사이의 거리 감각 자체가 다르달까요. 작가와 독자가 만나 그 친밀함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관계 맺기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 같은 관계가 번역가와 독자, 번역가와 클라이언트 사이에도 성립한다고 본다.


내가 흩뿌려놓은 흔적을 보고 나에 대한 호감을 표현하며 일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글을 통해 나란 사람을 읽고 그렇게 친밀함의 정서가 공유되어 그것이 일로 발전하는 사이.


언젠가 독자와도 그런 관계가 성립되는 날이 올 거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혼자 일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독자가 클라이언트가 될 수도 있고 온라인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의뢰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내가 혼자 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 아무리 잘 나가는 1인 기업가일지언정 나 혼자 일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갑자기 높아지려던 콧대도 한없이 낮아진다. 번역이라는 것은 원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행위다. 그 사실을 자신에게 누누이 상기시켜야 비로소 '잠시 혼자 일하는 시간'이 감사히 다가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