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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20. 2021

내가 아는 당연한 맛

20분을 걸어 아이 학교 앞에 도착한다. 1시 50분이 되자 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온다. 마스크를 쓴 터라 표정이 잘 읽히지 않는다. 그래도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니 안심이 된다. 사실 눈빛만 봐도 아이의 표정을 알 수 있으나 이왕이면 활짝 웃는 입을 보고 싶은데 일상용품이 되어 버린 마스크 뒤에 숨겨진 입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요즘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신을 본 아이가 기겁하는 모습이다. 아이는 바이러스보다도 마스크를 끼지 않은 자신을 더 무서워한다.


첫째 아이는 네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뉴욕에서는 만 네 살인 아이들에게 Pre-K라는 무상교육을 제공하는데, 그 전에는 학교에 보내려면 한 달에 최소한 2천 달러는 든다. 내가 4년 내내 아이를 끼고 집에서 일한 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등교를 하던 날,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아이의 모습에 감격했다기보다는 처음으로 아이와 그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된 나를 자축했던 것 같다.


등교하는 아이의 가방에는 도시락이 들어 있다. 한국의 어린이집과는 달리 따뜻한 급식은 제공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나오는 식사는 딱딱한 빵이나 껍질 채 썰어 봉지에 담은 사과 정도뿐인데 그마저도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다. 11시경에 점심을 먹고 학교가 파하기 직전인 1시 반쯤에 간식을 먹기 때문에 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먹을 점심과 간식을 별도로 싸줘야 한다.


아이의 요청에 따라 점심메뉴는 아직까지 계속 만두다. 아침에 일어나 H마트에서 사 온 자그마한 크기의 풀무원 만두 6개를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돌린다. 그 사이 과일이랑 빵이나 밥 따위를 준비해 도시락 통의 다른 칸에 넣어 놓고 간식으로 주스와 과자를 챙겨둔다. 나 같으면 질릴 법도 한데 아이는 <올드 보이>의 주인공도 아니고 줄기차게 만두만 싸 달라고 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떡볶이도 이틀 연속은 먹지 않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매일 같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나 보다. 덕분에 엄마는 편하고 좋다만 아이의 식성이 참으로 궁금하다.


아이의 밥을 미안할 만큼 쉽게 싸면서 지난날 내가 보온 도시락통에 싸갔던 수많은 밥들을 떠올린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엄마가 싸주는 반찬들이 정말 맛있었던 건 아니다. 맛을 음미한다기보다는 그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넣을 때도 있었고 이건 그만 싸줬으면 싶은 반찬도 있었다. 내가 아는 당연한 맛은 지극히 평범한 맛, 그냥 엄마의 맛이었다.


내가 때로는 맛없게 입에 넣었던 반찬들, 그 당연한 맛들이 절대로 쉽게 만들어진 게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식어빠진 계란말이와 다소 애매한 간들의 밑반찬들. 그걸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걸 철부지 고등학생의 나는 몰랐겠지. 내가 아는 당연한 맛들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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