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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n 04. 2021

오늘 아침에(feat. 바퀴벌레)

이 세상에는 여러 번 봐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장면이란 게 있다. 내게 그 중 하나는 내 집에서 쥐를 보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집에서 바퀴벌레는 보는 것이다. 그 중 한 장면이 오늘 내 앞에 펼쳐졌다. 창가에 서서 둘째 아이가 어제 헤집어놓은 식물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흙을 쓸어 담고 있었는데 순간 발등이 간지러웠다. 뭔가 살살 간질이는 기분이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기겁했다. 그곳에는 내 엄지손가락 세 개 만 한 바퀴벌레가 있었다. 아이를 냅다 집어 들고 뒤로 물러나며 난리법석을 부렸다.


바퀴처럼 빨라서 바퀴벌레라는 이름이 붙은 걸까, 갈색의 두꺼운 바퀴벌레는 엄청 빠른 속도로 바닥을 헤집고 다니면서 아이들의 장난감과 인형 위를 오갔다. 아이들의 의자 위로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는 바퀴를 보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근처에 있던 플라스틱 장난감을 냅다 집어 던졌으나 잽싸게 피한 바퀴는 생각도 못한 공격에 당황한 듯 저 혼자 뒤집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혼비백산 달아나고 말았다. 제발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가주면 고맙겠건만 그 정도 머리는 안 되는지 바퀴벌레는 자꾸 자신의 몸 두께를 감안하지 않고 낮은 틈 사이로 들어가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고 그걸 바라보는 내 몸은 자꾸 꿈틀거렸다.  


머리를 그렇게 획획 돌려보기가 몇 년 만이었던가. 내 머릿속 생각은 지금 당장 집에 있지 않은 신랑을 향한 원망과 저 빠른 속도라면 신랑이 오기 전에 집안을 전부 헤집고 다닐 거라는 계산, 그 때까지 몇 십 분을 공포 속에 보낼 수는 없다는 자각, 그렇다면 내가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신속히 전개되었다. 둘째 아이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창고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뿌리는 약을 찾으려고 했으나 약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아이의 비치 의자. 무게가 꽤 묵직하니 그거면 될 것 같았다(사실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의자를 들고 돌아오니 바퀴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 사이에 다른 데로 갔나. 고개를 돌리는 사이 갑자기 내 발 아래로 나타난 바퀴를 향해 나는 인정 사정할 것 없이 의자를 휘둘렀다(의자는 접혀져 있어서 길쭉한 형태였다). 벌레라면 치를 떠는 나였지만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집에는 우리 둘뿐인데 세 살짜리 아이가 잡을 수는 없을 테니 결국 나밖에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꽤나 큰 바퀴였기에 한 방에 적중할 수 있었다. 100퍼센트 사망에 이르게는 못했는지 신랑이 올 때까지 아이랑 방에서 기다리는 동안 슬금슬금 나와서 보면 바퀴는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었고 신랑이 도착할 무렵에는 180도 방향이 돌아가 있었다.


신랑이 뒤처리를 하는 걸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신랑이 집에 없었으면 저걸 내가....아,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나마 날아다니는 바퀴가 아니었던 게 다행이었다. 예전 집에서 바퀴가 갑자기 누워 있는 우리를 향해 날아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었다. 간만의 바퀴 습격 사건을 겪으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일을 시작하기 전인 매우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퀴벌레가 없는 집으로 이사를 가려면 빨리 마음을 수습하고 일을 해야 했지만 내 발등을 타고 지나갔던 바퀴벌레의 감촉이 아직 너무 선명했다(바퀴를 잡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실로 가서 피가 나도록 발등을 닦은 거였다).


바퀴벌레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현장을 찾았다. 그곳은 조용했다. 마치 어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마냥. 하지만 내 발등에는 어제 누가 사뿐히 밟고 지나간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내 눈이 닿는 곳곳마다 그곳을 질주하던 무언가의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이는 이제 safe place라며 나에게 don’t worry라 했지만 나에게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한 번 일어난 일은 언제든 또 일어날 수 있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어제의 바퀴처럼, 어제 아침처럼.


p.s. 그 후 또 한마리의 바퀴가 우리집을 방문하셨고 수퍼 아저씨를 불러 초강력 젤을 바르는 걸로 바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아직도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https://taling.me/Talent/Detail/3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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