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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09. 2020

이윽고 슬픈 외국어

해외살이의 이질적인 무언가

‘슬픈’이라고 해서 그것이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없어 슬프다는 건 아니다. 물론 조금은 그럴지 몰라도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自明性)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말하는 '슬픈'의 의미를 자명하게 알 것 같다.


소음이 조금이라도 섞일라치면 TV에서든 수화기 너머 서든 그 소리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는 우스운 상황이나, 의도는 전했지만 뉘앙스는 정확히 전달하지 못할 때 따라오는 씁쓸함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되는 것 하며, TV에서 나오는 소리가, 지하철 승강장에서 들리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내 귀에 녹아들지 못할 때 나는 슬픔과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곳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내 혀가 꼬부랑 혀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조금은 세련되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상대에게는 여전히 초등학생의 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나의 해외생활은 제발트의 《이민자들》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 가깝다.


이민선에 몸을 실은 후 도착지까지 무사히 살아남기를 기도했을 그 무거운 여정과는 달리 나는 비행기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수단에 몸을 싣고 편안하게 이곳에 건너왔다. 일찌감치 건너와 평생 겉도는 듯한 생활을 한 그들과는 달리, 그들보다 늦은 나이에 건너와서도 그럭저럭 적응하고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1년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살 당시에 남긴 기록은 무려 2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지금 읽어도 세월의 간격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외국에 거주하면서 이발소 걱정을 하고, 자신에게 요구되는 기대에 맞추되 조금은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자동차라든가 기타 물건을 구입하는 행동 따위가 그렇다.


하루키도 책에서 언급했듯, 이곳 사람들은 여자도 자신만의 일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그때도 그랬는데 하물며 20년이 지난 지금에는 오죽하랴. 그래서 나는 이곳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할 때면 나에게도 일이 있음을, 집에서 번역을 하고 있음을 흘리듯 말한다. 아니, 사실은 힘주어서 말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너무 뻔한 얘기를 강조해서 한 초딩마냥 부끄러워지는데, 그래도 상대가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신이 나서 떠든다.


나도 그들처럼 베이비시터를 쓰고 내 일을 하고 싶지만 내 일은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 넉넉한 돈을 벌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슬퍼지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 나는 이방인이라는 신분을 가만히 응시한다.


아이들이 크면 나도 이 사회에서 취업을 하고 돈을 벌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지만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이방인 신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 슬픔이 증발하는 것도 아닐 거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닌 나에겐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이질적으로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다.





줌파 라히리는《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 시절 미국에 살 때 부모님은 늘 뭔가로 인해 우울해 보였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언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40년 전 부모님은 전화로 인도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편지를, 캘커타에서 벵골어로 적힌 편지가 오기만을 자나 깨나 기다렸다...... 자신과 일심동체인 언어가 멀리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또렷이 간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언어와 떨어져 살면 자신은 텅 비어버린 듯한데 몸은 무겁게 느껴진다.


원하면 언제든 가족들과 통화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한국어로 적힌 편지가 오기만을 자나 깨나 기다리지 않는다. 원하면 사나흘 만에 한국어 책을 받아볼 수 있는 나는 내 언어를 또렷이 간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끔 텅 비어버린 듯한데 몸은 무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마치 한 몸인 우리를 억지로 때어놓은 듯한 슬픔이 거기 있다.


여기 와서 더 많은 한국어 책을 주문하는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국어로만 소통할 수 있는 그곳에 숨어 있는 시간만큼은 슬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으니까, 아니 내가 슬픈지조차 모르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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