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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29. 2020

행복의 맨얼굴이란 게 있다면

자주 만족하지만 가끔 덜커덕거리기도 하는 삶

20대의 나는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 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가장 친한 대학 친구가 2학년 때 이민을 가버리자 나는 두고두고 엄마에게 놀림을 받게 될 정도로 펑펑 울었는데 그건 친구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친구가 떠나버린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의 신랑이 된 남자 역시 내가 한창 회사를 다닐 당시 유학을 간다고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버는 것이 그냥 정해진 길이라 생각한 나는 어떤 마음이 그를 유학이라는 길로 저 멀리 자의로 떠나게 만든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외국에서의 삶은커녕 엄마를 떠나서 살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던 어린 나에게 그는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보였다.


삶은 알 수 없는 길로 흘렀고 10여 년이 지난 후 나를 그 사람 옆에, 이 머나먼 땅에 데려다 놓았다.




이곳에 온 지 7년 차에 접어드는 지금은 한국에서 살고 있을 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한국에 있을 때, 특히 회사에 다닐 때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장소들.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남의 속도에 맞춰 사느라 현기증 났던 일상들. 그런 것들이 비어 있는 지금의 삶은 어딘가 지나치게 단순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 내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군집에서 벗어나,
매일 하늘과 별, 바람과 나무를 보고 있다.
의식주나 문화에 대해서 스스로 취사선택하고 싶었던 소망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작은 위안을 느낀다.
 
                                                                                                        《가족의 시골》, 김선영


삶의 욕심을 가지치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으면 나는 이 책을 슬그머니 책장에서 꺼내어 내가 바라던 대로 사는 삶을 실천하는 용기 같은 것을 주워 담는다.


지금의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온 이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건 아마 오래된 동네가 주는 안정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체 뿌리가 약한 나란 사람에게는 그런 든든함이 필요했던 거 같다. 나 스스로 취사선택하는 삶도 괜찮다고 고개 끄덕여주는 그런 공동체.


이 동네에서는 누군가에게 쓸모를 다해 내다 놓은 물건이 다른 주인을 만나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데, 그게 나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위안이 된다. 남이 쓰던 물건에 손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너와 나의 모습은 때때로 알 수 없는 힘을 준다.


나도 얼마 전에 둘째 아이의 옷가지를 정리해 내다 놓았다. 어느새 태어났을 때 몸무게의 세 배를 훌쩍 넘겨버린 아이가 아기 때 입었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었지만 이제는 깡둥해져버린 옷들을 고이 접어 약간은 씁쓸한 마음으로 내다 놓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 시절을 내어 보낸 것 같아 한나절 속이 아렸던 것도 같다.     




이 공동체의 따스함을, 그곳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는 우리 가족을 생각하니 나를 만나기 전 신랑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시기,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또 쉽게 멀어질 수 있는 구간을 지나 나의 가족이라 부를 만한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기까지 신랑은 이 머나먼 타지에서 온기를 찾아 헤매었을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라고들 말하지만 분명 누군가에게는 언젠가, 라는 말이 큰 불빛으로 다가오는 법일 테니.


낯선 질감의 열망을 찾아 하나의 가족을 이룬 우리가 참 다행이지 싶다. 둘이 만나 넷이 되었으니 나의 뿌리도 그의 뿌리도 조금은 튼튼해진 게 아닐까.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살기란 자유로운 동시에 조금 외로운 면도 있어서 나는 자주 만족하지만 가끔 덜커덕거리기도 한다. 아무렴 어떠랴, 행복의 맨얼굴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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