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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07. 2021

번역을 하려면 통번역 대학원을 나와야 할까?

출판 번역만 할 생각이라면 통번역 대학원은 적절한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졸업생 중 출판번역가의 비율이 높지는 않다. 하지만 이해득실을 떠나, 2년의 시간은 졸업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큰 부분으로 남아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갔던 거라 그 사실만으로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학부 때 학점을 채우려고 억지로 듣는 수업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듣는 수업은 달랐다. 물론 공부는 역시 쉽지 않았지만(나에게 정식 공부는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학생 신분이라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차고 넘쳤다.


정영목, 박찬원, 민은영 등 훌륭한 출판번역가 선생님들과 수업에서 뿐만 아니라 사석에서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누라 뭐래도 참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영목 교수님과 박찬원 교수님은 출판번역가들을 위한 스터디 모임도 운영하셨는데 수업에는 별 관심이 없던 나는 뒤풀이를 겨냥해 이 수업에 종종 참석하곤 했다. 격의 없는 만남의 장이었던 그곳은 출판번역가의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장소였다. 한국에 있었다면 지금도 나갔을 그 모임이 해외에 살아서 가장 아쉽다.


공대를 졸업해 건설회사를 다닌 나는 남자들만 득실대는 분위기에 익숙했던 터라 여고 같은 수업 분위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개성 넘치는 동기들 중에는 춤을 추는 친구도 있었고 경찰로 근무하는 친구도 있었다. 모두가 같은 수업을 들으러 온 게 신기할 정도로 저마다 배경이 달랐다.



출판번역가가 되기 위한 길에서 통번역 대학원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아마 지금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방황하고 있는 번역가 지망생이 많을 것이다.


저마다의 경험치와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위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의 주관적인 경험을 토대로 말해보자면 나에게 대학원은 운전면허증과도 비슷했다. 면허증을 땄다고 바로 운전을 시작할 수는 있는 사람은 없다. 도로 연수가 필요하며 장롱면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제 도로에 뛰어들어 자꾸 운전을 해봐야 한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이 없으면 아예 운전을 할 수 없으므로 운전면허는 기본적인 통과의례인 셈이다.


통번역 대학원을 나와야만 출판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실제로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하고 출판 번역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지극히 낮으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나에게만 적용되는 면허증이라 하겠다.    


출판번역가가 되려면 출판 전문 에이전시에 들어가 그 분야에만 최적화된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일 것이다. 통번역 대학원은 출판 번역만을 전문으로 하지 않고 듣기 싫은 수업도 들어야 하는, 일종의 기숙학교 같은 커리큘럼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문을 전공으로 하지 않은 데다 한 동안 영어에 손 놓고 있었던 나는 이 같은 과정을 한 번쯤은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놓치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것을 살필 수 있도록,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수 있도록 계기를 제공해준 것도 그곳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과정을 건넌 뒤에는 각자의 노력이 덧대져야 한다. 사실 본격적인 시작은 그 이후부터라 하겠다. 한 권, 한 권 번역을 완성하는 과정에 더해 나만의 공부를 통해 실력을 쌓아 자립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결론적으로 통번역 대학원은 나에게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쌓아야 하는 기본적인 토대 같은 것이었다. 그 토대가 없었으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 내가 그 후의 길을 조금은 당당하게 걷도록 뒤에서 등을 밀어준 존재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 책(<그래도 번역가로 살겠다면>)에서 보다 자세히 풀었지만 통번역 대학원 졸업자에 대한 대우가 예전 같지 않고 비싼 등록금을 고려할 때 자신이 투자한 만큼의 가치를 뽑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내 갈 길은 내가 알아서 개척해야 한다. 통번역 대학원 졸업증 역시 무언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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