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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17. 2020

'되다'와 '하다'를 혼동하지 말 것

번역가가 되려는 그대에게


내 블로그에는 종종 상담글이 달리곤 한다. 현재 직장을 다니면서 번역가로 진로를 바꿀까 고민 중인데 조언을 부탁한다고. 주위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그러하니 제발 짧게나마 답변을 부탁한다고. 나의 과거를 보는 듯해 나는 그런 글에는 보통 성심성의껏 답을 남기는 편이다.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영어공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일단 해보라는 응원의 마음을 담아 꼼꼼하게 답변을 남긴다.


나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다. 그저 마지막으로 힘이 되는 말을 듣고 싶을 뿐. 낯선 이일지언정 먼저 가 본 누군가가 괜찮다고, 당신의 꿈을 응원한다고 말해주면 용기 있게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므로 나는 나에게 정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런데 간혹 일의 본질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까요? 같은.


모든 일에는 좋은 것만 존재하지도, 싫은 것만 존재하지도 않다. 나의 직장생활만 돌아봐도 그렇다. 마지막에는 결국 싫어 떠났지만 5년이나 다닐 수 있었던 건 좋은 부분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넉넉한 월급이었든,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었든. 마찬가지로 번역이라는 일을 좋아서 선택한다 해도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4대 보험 따위 없는 불안정한 신분과 경제적 고단함에 지치기도 할 거다. 당신이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다. 얼마나 좋을지, 단점들이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좋을지는 길을 건너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영어 토익 점수가 이러이러한데 제가 번역가가 될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그들은 답을 알고 있다. 터무니없는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족하면 더 공부하면 된다는 걸. 욕심과 현실 사이에서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듯한 모습 앞에서는 객관적인 대답이 무용하다.


그런 이들에게는 일단 해보라고, 하고 싶으면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다’와 ‘되다’를 혼동하지 말라고. 최고의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우선 번역을, 번역 공부를 하라고. 하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 정말 하고 싶으면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고 부족한 면을 보충하게 되어 있다. 내 실력을 탓하기보다는 일단 하고 본다. 그러고 나서 도저히 안 되면 그때 포기한다. 


나 역시 그랬다. 정말 하고 싶었기에 부족한 실력에 좌절했고 그 좌절을 발판 삼아 위로 올라갔다. 나의 부족함을 밟고 조금씩 올라가다 보니 어느 덧 스스로를 번역가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누구든 최고의 번역가가 되기는 힘들지라도 ‘번역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그러니 최고의 번역가가 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우선 ‘번역’을 하자.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책을 번역하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권의 책을 번역해 보는 일이었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인터넷 카페의 스터디에 참여했다. 때마침 곧 스터디가 시작될 한 권의 책이 있었고 나는 카페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꾸역꾸역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번역해냈다. 아주 얇은 책이기는 했으나 당시에 내 실력은 형편없었다. 영어를 손에서 놓은 지 한참 된 상태였고 한국어 표현도 엉성했다. 나 스스로 문장을 완성해 글을 써본 경험조차 없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재생되는 기분으로 그 구간을 통과하며 나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시작이 반이란 말이 정말 맞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책을 한 권 번역해본 뒤 (그것도 공부 차원에서) 나는 책을 번역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 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말도 안 되는 실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을 테지만 그건 30년을 함께 살아온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능인 작은 성실함을 믿었다. 책을 번역할 때 손끝에서 발산되는 짜릿함은 나의 믿음에 적절한 양념을 뿌려주었으니 나는 그토록 찾던 일을 만났다는 묘한 흥분에 둘러싸여 한 동안 둥둥 떠다녔다.


그 후 부족한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번역과 관련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전반적인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오프라인 강의도 들었다. 번역가로 데뷔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력이었기에 우선은 영어 공부에 집중해야 했다. 누군가는 한국어 문장력만으로 번역가가 되었다지만 나에게는 기본적인 영어 실력을 높이는 일이 절실했다.


공부는 즐거웠다. 그 동안 모르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으니 힘들어도 마냥 좋았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공부를 할 때의 희열이랄까. 늦은 나이에 하는 밀도 높은 공부는 10대 때 꾸역꾸역 하던 공부와는 흡수력 자체가 달랐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기도 했지만 나는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즐겼다.


내가 처음 번역 공부를 시작할 때에 비하면 관련 정보가 넘칠 정도로 많은 시대다. 번역가 되는 법, 번역 공부하는 법, 번역가의 생활상까지 마음만 먹으면 속속들이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언젠가 저런 번역가가 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지금 당장 노트북을 열고 한 자 한 자 옮겨보는 순간이 진짜 번역가를 만든다.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하다’가 지닌 힘에 무게를 싣는다. 번역이란 게 좋아 무작정 뛰어든 사람으로서 내가 자신 있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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