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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n 24. 2021

번역하고 싶은 책(feat. 기획서 작성법)

번역하고 싶은 책이 있다. 개인적으로 기획서를 통한 번역은 잘 된 적이 없어서 부정적인 견해를 품고 있지만 이 책은 여유가 될 때 제대로 번역해서 출판사에 제안해 보고 싶다. 어떤 출판사에 제안할지도 다 생각해 뒀다. 책도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 왜 기획서를 안 쓰냐고? 잘 쓰고 싶어서다. 지금보다 더 잘 쓰고 싶어서. 번역도 더 잘하고 싶어서. 그러려면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틈이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책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하다.


블로그 이웃 번역가님 중 기획서를 정말 많이 작성하시고 또 높은 확률로 오케이를 받아내시는 분이 있다. 그분께 비법을 물어봤더니 제법 긴 답변이 돌아왔다. 트렌드를 파악하고 한국 시장을 파악하고 등등등. 하지만 비법을 듣고도 나는 영 기획서를 쓸 때면 망설이게 된다. 통과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망설이는 마음이 앞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웃 번역가님은 정말 많은 기획서를 쓰고 계셨다. 그러니 그중 당첨될 확률도 높은 것이겠지. 물론 나와는 차원이 다른 안목을 소지하고 계시겠지만....


권남희 번역가님이 2011년에 낸 <번역에 살고 죽고>를 보면 저작권 보호법이 없을 때 일본에서 책을 바리바리 사 와서 기획서를 쓴 번역가님 얘기가 꽤 많이 나온다. 서점에 가서 괜찮아 보이는 자기 계발서와 소설을 무작정 사서 한국으로 갖고 오는 그 대담함이란!!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온갖 정보를 다 뒤지고 책을 읽고 나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소심한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출판사에서도 섣불리 받아들이지 못하나 결국 몇 년 후에 다 뜰 책들을 일찌감치 알아보시고 너무 앞서간 제안을 하신 안목도 너무 내 것으로 하고 싶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여섯 번 기획서를 써서 돌려본 게 다다. 한 동안, 그러니까 일이 없을 때에는 내가 기획하는 책은 다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한 번에 몇 개씩 기획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방법부터 잘못된 것 같지만. 나는 괜찮은 책은 이미 에이전시에서 판권을 사 갔다는 말에 너무 유명하지 않은 소설을, 꽁꽁 숨어 있는 책을 제안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 소설이 물론 정말 괜찮았으면 잘 되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 소설을 제안하려고 했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그렇게 또 하나 알아가는 거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기획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뭐, 나만 몰랐을 수 있지만.


홈스쿨링 책이 괜찮아 보여서 호기롭게 책을 읽고 주말 내내 기획서를 작성해서 육아서적 전문 출판사에게 보내본 적도 있다. 그랬더니 “홈스쿨링이 합법인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을 시 교육청에 소명해야 할 부분도 있고 제약이 좀 있습니다.”라는 꽤나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 답이 돌아왔다. 아, 멍청했던 거야 뭐야. 예전에도 한국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혼자 감명받아 어떤 엄마가 쓴 에세이를 기획했더니 한국 시장에는 영 맞지 않을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이렇게 시장분석이 안 된 상태에서 기획을 하려 했다니. 역시 그러면서 배우는 거겠지,라고 믿고 싶다.


다른 번역가들은 얼마나 많은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는지 모르겠다. 나는 몇 군데 보내고 거절을 받으면 점점 슬퍼져서 (사실은 자신감이 떨어져서) 그냥 외서 기획서 폴더에 묻고 만다. 예전에는 그렇게 퇴짜를 맞으면 1인 출판사 카페에 올려 원하는 분들에게 개인적으로 공유하는 등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헛된 노력에 마음을 쓰기 싫어하는 못난 자아가 삐죽거리다 보니 이제는 그마저도 안 하게 된다.


내가 제안한 책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책이 몇 년 후 엉뚱한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나온 적도 있다. 뭐 나의 안목이 완전 꽝은 아니었다는 뜻이니 기쁘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왕이면 내 손에서 번역되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더라. 그런데 그건 나만 겪는 일은 아닌가 보다. 가끔 주위 번역가에게 자신이 기획했던 책을 내가 번역했더라는 얘기를 듣는다. 나는 에이전시나 출판사에서 주는 책을 받아 번역한 것일 뿐이므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번역가의 한계를 체감하게 된다.


번역가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른 사람이 의뢰해 주지 않으면 일조차 할 수 없기에 번역가는 기다리는 직업이다. 물론 아예 출판사를 차려 모든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용기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번역 하나만으로도 힘든 사람인지라 자생력이 없다. 기획력도 부족해서 내가 출판사를 차리면 쫄딱 망할지도 모른다. 그냥 주는 책을 감사히 받아 번역을 하고 괜찮아 보이는 책들을 기웃거리는 수밖에.


그런 내가 요새는 기획해보고 싶은 책들이 여러 권 된다. 경력이 쌓이니 안목도 더디게나마 느는가 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제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 1년 치 번역할 책이 쌓여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너 권은 내다보며 작업하다 보니 늘 마음이 바쁘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일을 벌이지 않게 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그럴수록 괜찮아 보이는 책은 자꾸 눈에 띈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책이   있다. 기획서를 쓰기 전에 얼마 전에 알게 된 출판사 편집장에게 그냥 얘기만 꺼내봤는데 괜찮아 보인다고 판권을 확인해 보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호라, 이런  인맥인 건가. 그런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목이 빠질  같다. 판권 확인에 원래 그렇게 오래 걸리나. 역시 꽝인 건가. 혼자   있는 일이 없는 번역가는 슬플 뿐이다. 사실 나도 확인해 보려면   있지만 귀찮다.


알다시피 기획서를 쓸 때 판권 확인은 필수다. 판권이 이미 팔린 걸 혼자서 번역하고 시간 들여 기획서까지 작성하는 번역가는 21세기에 없을 거라 본다. 판권은 해당 출판사에 메일로 문의하면 되는데 나의 경우 답을 받은 확률이 50퍼센트도 안 되었다. 그래서 더 꺼려지는 것일지도. 한 번은 자신은 담당자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메일을 전달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런 식으로 전달만 하다가 결국 답을 받지 못한 적도 있다. 역시 한국이나 미국이나 책임 회피는 만연한 현상 같다.


써 놓고 보니 기획서 작성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서는 안 되는 일만 나열한 것 같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파악하는 게 무언가를 하는 방법일 때가 많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반면교사 삼아 나와는 정반대로 하면 기획서 성공 확률이 높아질 거라는 신뢰하기 애매한 조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덧. 출판사에서 판권이 살아 있다고 연락이 왔고 검토서를 부탁해서 검토서까지 작성해서 보냈다. 몇 주 후 결과가 나온다. 두둥. 잘 되었으면 좋겠다.


https://taling.me/Talent/Detail/3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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