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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n 16. 2021

맨 부커상 최종 후보작이라고요?

2016년 말, 아침에 일어나 보니 출판사 담당자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혹시 번역가님 그 도서 번역이 끝나면 다른 번역 스케줄이 있으신지요? 저희가 문학책 번역할 게 있는데 번역가님께서 별다른 스케줄이 없으시면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진행 중인 책의 안부를 묻는 내용도 있었으나 내 눈에는 ‘문학책’이라는 세 글자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벌렁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해 머리를 뚫고 나갈 것만 같았다. 얼마 전 한 돌을 맞이한 딸아이는 그런 나를 뭔 일 이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설레발치다가 실망할 수 있으니 우선 메일을 차근히 읽기로 했다. 담당자는 70쪽까지 직접 번역하다가 힘들어서 포기했다며 파일과 원서를 보내주었다. 무려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경합하다가 아깝게 탈락한 맨 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감히 이런 책을 맡아도 되는 건가. 작가의 명성을 그르치는 건 아닌가. 섣부른 판단은 옳지 않다며 일단 작가 검색에 들어갔다. 작가의 이름은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쓴 주제 사라마구의 동생은 아니겠지, 페르난도 페소아와 친척은 아닐 거야, 하며 인터넷 검색창에 작가의 이름을 쳐보았다. 다행히 검색 가능한 사람이었다.  


포르투갈계 어머니와 브라질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는 오늘날 아프리카 문학에서 포르투갈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했다. “앙골라 루안다와 포르투갈 리스본, 브라질을 오가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빈곤에서 허덕이는 앙골라의 현실과 그곳 사람들의 비인간적 모습 그리고 앙골라 사회의 부정부패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은 <기억을 파는 남자> 한 권이었는데 다행히(?) 크게 회자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작가 검색을 마치고 아마존 리뷰까지 읽고 나니 납작하게 눌렸던 용기가 슬금슬금 펴지기 시작했다.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형체 없는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언제나 구체성의 힘이었다. 담당자가 보내준 파일은 미국 번역가가 번역해 놓은 영어 번역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중역을 하는 거였다. 담당자가 보내준 파일을 열어 읽어보니 다행히 문체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막바지 작업이던 기존 책 번역을 넘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번역을 시작했다.


2017년 봄에 파일을 넘겼고 그로부터 거의 1년 뒤인 2018년 1월에 책이 출간되었다. 나에게 하다 만 번역본을 넘겼던 담당자는(미안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다시 했다) 많지 않은 번역료를 약속하고는 개인적인 이유로 황급히 퇴사했고 그 후로 두 번 넘게 담당자가 바뀌고 용케 몇 번의 역자교까지 마친 뒤 소설은 무사히 출간되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아니 예상대로 이 책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나는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첫 문학 번역 작품인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다니. 맨 부커상 최종 후보작인데 매스컴조차 제대로 타지 못하다니. 출판사의 마케팅 실패인가, 나의 실패인가. 하지만 그런 한가한 고민을 하기에 프리랜서의 삶은 하루살이의 그것에 가까웠으므로 또 다른 밥벌이를 찾아 나서는 고달픈 하루 속에 이 책은 나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잊고 있던 이 책이 다시 내 삶에 등장한 건 그로부터 3년 후였다. 2020년 여름, 나는 <Brolliology>라는 책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그 책에 언급되는 수많은 인용문 가운데 그 소설의 일부가 담겨 있었다. 해당 출판사의 허락을 받지 못해 무수한 인용문을 전부 다시 번역해야 했던 작업에서 유일하게 구제받은 부분은 내가 번역했던 소설의 인용문 뿐이었다. 내가 번역한 소설은 2권이 전부였기에 꽤나 낮은 확률로 두 책이 만난 거였다. 우산이라는 매개체로 둘은 만날 운명이었을지 몰랐어도 내가 그 두 책을 모두 번역하게 된 건 정말 큰 우연 아니었을까.


문학 작품과의 두 번째 인연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인터넷으로 발품 아니 손품을 부지런히 판 덕분일까, 첫 번째 소설을 탈고하자마자 연이어 또 다른 소설을 번역하게 되었다. 여름 내내 무려 448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땀 뻘뻘 흘려가며 토해내듯 번역했다.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된 적 있는 그 소설은 그 후로 나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 책을 끝으로 소설은 한 동안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2018년과 2019년, 2020년을 나는 소설 없이 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설을 번역하는 대신 소설을 주야장천 읽으며 보냈다. 그렇게 소설의 허기를 달랬다. 한국 문학에서 내 나이 또래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였기에 그걸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달콤한 시간이었지만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다. 번역된 소설들이 출간되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럽고 질투가 났다.  


소설 가뭄에 단비가 내린 건 2020년의 마지막 달, 코로나로 전례 없이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온라인으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 번역가의 소개로 이곳 뉴욕의 출판사와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호러 소설을 계약하게 되었다. 소설 속 세상은 피가 튀기고 오싹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창한 시절이었다.


첫 번째 소설 번역을 마치고 뒤이어 새로운 소설을 번역하는 가운데 또 다른 소설 번역 의뢰가 들어올 때쯤 이제는 더 이상 소설 번역에 목마르지 않겠지 생각했다. 나의 착각이었다.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도 모르는 사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고 어느새 나는 또 다른 기회를 욕망하고 있었다.


기회란 무얼까. 기회는 ‘주어지기도’ 하고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회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기회를 맞이하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는 꼬리를 살랑 치고 저 멀리 도망치는 기회가 의외로 많다. 돌아보면 나는 그런 기회의 목덜미를 붙잡은 적이 꽤 있다. 두 번째 소설을 번역해 보겠다고 지원했을 때 출판사에서 올린 글의 조회수는 이미 200이 넘어가고 있었다. 가망 없을 거라 생각하고 뒤늦게 보낸 메일은 새로운 기회의 옷을 입고 나에게 돌아왔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기회를 이 사회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거라고 고집스럽게 말한다. 꼭 그럴까.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맞이한 기회일지라도 그걸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가치 있게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더 완벽한 기회를 노리며 밟고 지나간 디딤돌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거다. 두 권의 소설을 번역했을 때의 내가 준비된 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본 기회는 직진으로 걷지 않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꽤나 휘청이며 날 듯이 나에게 주어지는 기회 역시 곧장 나를 향해 날아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우리가 한참 전에 쏘아 올린 화살 역시 지금쯤 엉뚱한 대기를 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기회가 내 과녁에 꽂힐 때까지 야금야금 준비하며 기다려볼 일이다.

일단 지금 번역하는 소설부터 잘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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