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ㅇㅇ 한테는 거기가 날지도 몰라. 너처럼 여기서 누릴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 말이 맞았다. 상위 0.1퍼센트의 생활이 보장된 언니와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이제 막 프리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나는 한국에서의 계급 자체가 달랐다. 동전의 양면 같았지만 그래서 나는 떠날 수 있었다. 보장이 확실한 대신 한 곳에 얽매여야 하는 생활의 대척점에 내가 있었다. '프리'가 진짜 자유를 의미한다고 믿었던 2년 차 프리랜서였기에 나는 보장보다는 자유에 방점을 찍었다. 당시의 내 뇌는 세상 어디에서도 일할 수 있겠단 자신감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내 인생 좌표 위에 해외는 없었다. 처음부터 반쪽짜리 생활이 예상되는 해외살이었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찾은 일이 모국어를 기반으로 했기에 해외에서 일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을 찾을 수도 있었다. 한국어 가르치기, 영어에서 한국어가 아닌 한국어에서 영어 번역하기. 전혀 다른 일을 해볼 수도 있었다. 카페나 식당에서 일하기.
하지만 나의 열정이 향한 곳은 책이었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어 책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나에게 이곳에서 돈 벌어보라는 말을 안 해서 미련하게 아직까지도 꿋꿋이 원화를 벌며 살고 있다. 원화가 통장에 꽂힐 때마다, 달러로 생활비가 나갈 때마다 내가 온전한 인간으로 이 나라에서 기능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 돈을 달러로 환전해 옮기는 일과는 별개로, 끝도 없이 오르는 환율에 눈물을 찔끔 흘리는 일과는 별개로, 내 안에서는 이건 반쪽짜리 해외생활이 아닌가 하는 자괴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버젓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신랑과 이 나라에서 태어나 이 나라 여권이 있는 아이들과는 달리 SSN(Social Security Number) 없이 살아가는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진 것 같다. 아이가 낳았을 때에는 아이의 어머니 이름 란에 자동으로 남편 성을 따라 나까지 김 씨로 변한 적이 있었다. 아이 수업을 등록하는 온라인 사이트 역시 아이가 김 씨라고 나까지 자동으로 김 씨로 등록되어 수정조차 할 수 없었던 적도 있다. 소외감을 안기는 건 이토록 작은 일들이다.
몇 년 전까지만 나는 반쪽짜리 생활이 얼마나 이어지겠냐, 나도 곧 이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지 않겠냐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은 내가 늘 해오던 일을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경제적인 선택으로 만들었고 아이들이 어린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게으름, 그 누구도 건너보지 않았던 애매모호한 영역, 그러기에 누구도 딱히 조언해줄 수 없는 상황들도 한몫했을 테지만 말이다.
8년 전 뉴욕행 비행기를 끊을 때만 해도 프리랜서라는 신분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좁은 세계에 가둬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얼추 마련한 만 달러가 미국에 가자마자 신랑 빚 갚는 데 사용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처럼. 미련하게도 세상 모든 일이 약속한 대로 굴러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굳이 낯선 땅에서 또 한 번 마주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자의 반, 타의 반, 그러니까 자신이 처한 불균형한 입장을 어느 정도 인지한 채로 해외로 떠나고 또 국내로 들어온다. J2 비자, H2 비자 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불안함을 단 채 매일을 살아간다. 해외에서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가 전해질 때 그 옆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이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상기하게 하는 스토리. 하지만 그림자가 아니다. 남의 꿈을 위해 따라온 이들이야말로 진짜 치열하게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외생활자들』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
"나는 늘 싸움 끝에 나의 비자를 들먹이며 J-2처럼 살 생각은 없다고 울었다. 나도 내 일을 할 거라며 흐느꼈다. 지나고 나서야 그날들의 싸움을 오롯이 남편과 나를 비교하는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영주권이 나오기 전에는 일할 수 없는 신분에 집착했다. 당장 이곳에서 일할 생각도 없으면서 ‘하지 못함’이라는 신분에 갇혀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 취급한 적도 있었다. 하지 못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그때의 나는 악착 같이 이 땅에서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알아봤지만 막상 영주권과 취업권이 보장되고 나니 그런 마음이 조금씩 휘발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자리는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은 다 변명일까. 가끔 생각해보지만 답은 없다. 어차피 답을 찾으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열린 질문으로 두고 지낸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힘이 있어 단조로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낸다. 평범해 보이는 하루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욕망들을 어루만지며 또 하루를 버텨내게도 하고, 다른 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보고픈 욕구를 낳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초급 한국어>의 주인공처럼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민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꿈도 꿔보고, 미련이 남은 영문학 공부를 해볼까 하는 현실 도피적 목표도 세워보게 된다. 두 아이를 돌보며 닥치는 대로 일하는 길게 늘인 엿가락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하루를 살아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뜬구름 잡는 미래만이 어떤 날의 나를 살리기도 한다.
엄마 말처럼 나한테는 이 나라가 나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펼칠 수 있을 기회를 잃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쉽지만 나 스스로 어떠한 틀에 가두지 않는 한 내 앞에는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게다가 번거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 한,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크게 다를 건 없다. 8년 동안 미국에서 원화만 벌어왔지만 우직하고도 미련한 그 세월 덕분에 그거 하나만은 진심으로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