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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Sep 02. 2022

 미(역)국과 미국 사이

첫째와 둘째 사이에는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있다. 계획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첫째와 두 살 터울로 둘째를 계획했더랬다. 그때만 해도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줄 알았다. 한국인 의사를 굳이 찾지는 않았다. 영어가 완벽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이 사회에 뿌리내릴 거라면 익숙한 것에서 하나씩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첫째를 임신한 뒤 다급히 보험에 가입한 터라 의사를 찾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임신 10주에 접어든 상태였다. 의사들은 초진 환자를 받지 않으려 했다. 이유는 몰랐다. 전화기 너머 그들은 초진 환자인지 먼저 물었고 무언가를 꺼리는 듯한 말투로 당당하게 거부 의사를 표했다. 예약을 잡고 찾아 간 맨해튼 병원에서 감기 바이러스만 받아온 날, 아무 의사나 날 좀 받아주면 감사하겠다 싶었다.


미국 의료는 병원이 아니라 의사를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내가 가진 보험을 받는 의사를 인터넷에서 찾아 그들의 개인 오피스에 찾아가야 한다.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임산부가 한 곳에서 관련 검사를 전부 받을 수 없다. 초음파를 받아야 할 때면 대형 병원에 가야 했고 당뇨 검사를 할 때에는 전혀 다른 클리닉을 찾아야 했다. 출산은 당연히 대형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줄자로 배의 둘레를 재는 자그마한 진료실의 진찰대에 누운 채 둘째 아이가 되었을 수도 있는 태아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혼자였다.


“아기 심장이 안 뛴다네.”


진료실에서 나와 신랑에게 문자를 보냈다. 손에는 소파 수술 관련 서류가 들려 있었다. 내가 직접 전화해서 예약해야 했다.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모든 것이 한 병원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텐데. 처음으로 한국 병원을 떠올렸다. 그 매끄러운 절차를. 편리함을.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죠?”


“2월 21일, 1982년이요.”


“오늘 무슨 수술을 받으러 왔죠?”


“소파 수술이요.”


접수대에서, 수술 직전, 마취 직전 같은 질문을 다섯 번 넘게 반복했다. 소파 수술이라는 단어에 무감해졌다.


수술은 출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지 멀쩡한 나였지만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굳이 침대에 누운 상태로 수술실로 옮겨졌다는 것, 수술실이 너무 추웠다는 것, 마취에서 깨어난 뒤 한참을 횡설수설했던 것만 기억한다. 위로도, 안타까운 눈빛도 없었다. 그 합리적임이 차라리 편했다. 가족들이 멀리 있다는 사실이 차라리 고마웠다.


첫째 아이는 알고 지내던 아이 친구 엄마에게 맡겨두었다. 그 친구라도 사귀어둬서 다행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걱정되었다. 엄마와 떨어져 지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아이였다. 엄마가 어디 갔는지, 아빠마저 어디 갔는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친구가 보내온 사진 속 아이는 맑게 웃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찍지는 않았겠지 싶으면서도 그 모습을 보자 위안이 되었다.


집에 와서 남편이 미리 끓여놓았던 미역국을 먹었다. 유산도 출산과 똑같이 몸에 무리가 간다며 출산과 똑같이 산후조리를 해야 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나 보다. 뜨끈한 미역국을 후루룩 받아먹는 내 몸은 지나치게 한국적이었다. 그 아이러니함이 웃겼고 내 옆에서 호호 불어가며 미역국을 받아먹고 있는 아이를 보니 내가 선택한 미국적인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첫째 아이를 출산한 뒤 간호사가 내어준 식판에는 얼음물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아 그 옆에 놓인 딱딱한 빵을 노려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뭐 다른 거 필요한 거 있냐고 물었다. 따뜻한 물은 글렀다 싶었다.


“음.... 사과? 과일이 먹고 싶은데.”


간호사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병원에 신선한 과일은 없다고 했다.


“과일 후르츠는 있는데 그거라도 갖다 줄까?”


“어, 그러면 좋지, 고마워.”


미국에 와서 한 번도 내 돈 주고 사 먹을 생각을 못한 음식이었다. 한참 후 신랑은 집으로 가 엄마를 데리고 왔고, 엄마와 함께 미역국이 왔다. 엄마는 보온병 뚜껑에 미역국을 덜어 나에게 건넸다. 엄마가 끓인 미역국은 맛있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신랑이 끓인 미역국은 엄마가 끓인 미역국과는 달랐지만 맛있었다. 미국적인 것만 주장하던 내가 ()국을 먹으며 몸을 위로하고 있었다.  몸만큼 한국적인 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상 미국적인 것만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1 이 지나고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첫째 아이와는   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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