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고기자리 Sep 15. 2022

You're a good mom.

둘째 아이는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한 채 떼를 쓰고 있었다. 놀이터에 가야 한다며. 아이가 떼를 부리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많은 부모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지만 먹힐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기에 육아서가 가르쳐주는 말을 그대로 지키기란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힘들다. 육아는 그래서 어렵다. 미국 부모들은 어떻게 하나 여러 번 지켜봤지만 땡깡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진리만 얻었을 뿐 그들도 뾰족한 수는 없어 보였다. 다만 아이의 땡강에 굴복하지 않고 여러 번 같은 말을 차분하게 반복하는 모습만은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아이와 한 번 눈을 마주친 뒤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 간다.”


아이는 더 심하게 악을 쓰며 바닥에 드러누웠지만 슬쩍 곁눈질로 보니 따라는 오고 있었다.


‘좋아, 이렇게 일단 갈 수 있는 만큼 가보자.’


주위 눈치가 조금 보였지만 어디에선가 본 방법을 나 스스로 시도하고 있음을, 그게 조금은 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서른 걸음 정도 갔을까 저 멀리서 아까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던 여자가 나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잔소리를 하려는 건가 내심 불안했다. 그런데 여자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You‘re a good mom. You’re strong. I know it’s hard. But you’re good.”


생각도 못한 칭찬 앞에 굳었던 어깨와 안면 근육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녀의 응원으로 내 마음에는 뜨끈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자리잡았는데 그게 뭔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응원이 이어졌다. 자그마한 아이가 온몸으로 뱉어내는 괴성에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한데 주위 사람 몇몇이 웃는 얼굴로 나를 응원했다.


“I have four of them.”


나이 지긋한 한 여인은 나를 향해 찡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그들’로 보이는 다 큰 아이 넷이 웃는 얼굴로 뒤따랐다. 자동차로 향하는 짧은 시멘트 바닥길이 good mom만 걸을 수 있는 레드 카펫처럼 보였다. 아이는 결국 아빠의 품에 안겨 억지로 차에 앉혀졌지만, 신랑이 없었다면 아이를 차까지 무사히 데려갈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도 우리 부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그녀가 우리의 마지막 모습에 실망했을지도 모르지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유치했지만 칭찬이 나를 웃게 만든 거였다.


엄마들은 아이를 통해 간접 칭찬을 받는 데 익숙하다. 아이가 착하다, 예의 바르다,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 따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칭찬받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인 나를 칭찬하는 말은 흔치 않다. 그 칭찬이 고마웠던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칭찬이 필요했다. 번역을 잘한다는 칭찬도 필요했지만 좋은 엄마라는 칭찬도 받고 싶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 후로 아이가 떼를 부릴 때면 그 여인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머리솟으로는 수심 200미터까지 잠수하는 황제펭귄을 그려가며, 그 안의 소리없음을 상상하며.


‘You’re a good mom.‘



많은 부모가 말을 듣지 않는 아이 앞에 무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체벌은 이 나라에서 허락되지 않는 방법이다. 부모는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방법을 택한다. 미국 애들이라고


"네, 어머님,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했군요. 이제 땡깡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뭐 이러겠는가. 하지만 손쉬운 체벌 대신 설명을 택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큰다. 제발 아이들을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해달라고 말하며 아무리 육아서나 유튜브를 들이밀어본들 본인이 체벌을 받으며 자란 신랑은 극복이 되지 않는가 보다. 나라고 쉽겠는가. 마구잡이로 손이 먼저 나가던 지난날들을 아이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내 안의 괴물을 잠재우지 못하던 시절을.


내가 그 시절의 나를 극복하고 조금씩 변하는 과정이라면 신랑은 아예 변할 생각이 없나 보다. 아이들은 체벌을 하는 아빠 앞에서 고분고분해지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건 내 몫이다. 저건 아닌데 하면서도 섣불리 중재했다가는 아빠가 곤란해질까봐 그러지도 못한다. 중간 역할은 힘들다. 아빠만 나쁜 사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빠가 없을 때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아빠가 체벌을 안 할수록 너희들이 잘 행동한다는 걸 아빠에게 보여주자. 엄마도 아빠를 계속 설득할 테니까 너희들도 도와줘, 알았지?"


신랑이 손 쉬운 체벌을 하려고 할 때 아이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면 좋겠다. 조금, 아니 많이 돌아가더라도 다른 선택을 하기를. 미국적인 것을 많이 포기한 나이지만 이러한 양육 방식만은 정말 따르고 싶다. 모두가 조곤조곤 얘기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닮고 싶다.



물론 두 아이가 싸우기 시작하면 진짜 답이 없다. 솔로몬의 선택을 내려야 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떼 부리는 한 명을 설득하는 문제와 억울하다 읍소하는 둘을 동시에 설득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아무리 중심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도 나 혼자 억지 부리는 형태로 마무리된 적도 많다. 솔로몬을 찾아온 두 아이는 둘 다 못마땅한 얼굴로 뒤돌아선다. 하지만 그때도 생각한다. 나는 좋은 엄마라고. 지금은 아리송한 판결밖에 내놓지 못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솔로몬이라고 처음부터 지혜로웠을 리는 없다. 어디까지가 희극이고 어디까지가 비극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하루지만 때로는 그 경계를 엄마 스스로 정할 수 있음을 아는 것, 그런 태도야말로 우리를 good mom으로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