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일어나. 벌써 이삿짐 차 왔다고.
퀸스를 떠나 브루클린으로 이사한 지 2년 만에 다시 짐을 쌌다. 2년 계약을 끝으로 집주인은 집세를 너무 많이 올렸고 코로나로 신랑 연봉은 삭감된 터라 좋게 말해 이사였지 쫓겨난 거였다. 미국 와서 처음으로 깨끗한 집, 세탁기 있는 집에 산다는 나의 로망은 단 2년만 누린 사치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아이들 학교에서 꽤 멀어진 1층 집으로 급하게 이사를 감행했다.
이 동네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선배 커플이었다. 근처에 진짜 큰 공원이 있어, 아이들 키우기 좋지, 선배는 말했다. 다소 촌스러운 첫인상의 이 동네는 그럼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 같았다. 번잡한 맨해튼, 이방인의 장소로 기억되는 퀸즈와는 달랐다. 안정적인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이곳이라면 마음 놓고 기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내가 직접 고른 동네와 집.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삿짐이 빠져나간 빈집을 바라보았다. 둘째 아이가 어정쩡한 자세로 걸어 다니던 복도, 그 자그마한 몸이 밖을 내다보기 좋아하던 창문에 오래도록 눈이 머물렀다. 방은 하나였지만 처음으로 안방 옆 자그마한 공간에 내 책상을 마련해 번역도 하고 글도 썼다. 널찍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소음은 이삿날 아침에도 변함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마음 편히 일 하지는 못했다. 딱히 아이들을 맡길 곳 없는 해외생활인지라 늘 두 아이를 매단 채 일했다. 코로나 사태로 가족 모두 집에 머물자 돌봄의 강도는 거세졌지만 글을 쓰고 옮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신랑이 집에 있으면 좀 낫겠지 싶었지만 별 소용없었다. 신랑과 내가 둘 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면 두 아이 모두 나에게만 악착같이 매달렸다. 둘째 아이가 내 무릎 위로 기어올라 노트북을 두들겨대면 첫째 아이는 경쟁하듯 내 무릎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셋이 아닌 혼자의 몸으로 일하는 신랑을 보고 있으면 사랑이고 뭐고 그냥 덜 받는 쪽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두 아이가 번갈아 가며 엄마를 부르면 방으로 도망갔지만 그 집에는 잠금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금세 아이들에게 포위당하곤 했다. 잠금장치를 달지 않은 집주인을 원망했다. 잠금장치의 중요성은 버지니아 울프도 설파한 적 있다. “자기만의 방과 1년에 500파운드의 수입과 방해받지 않을 시간이 있다면 여성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말 앞에는 사실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자물쇠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성 해방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인 셈이다.
그 집에 살 당시 유독 작업실 욕심을 많이 냈다. 일은 많은데 아이들은 도와주지 않던 때였다. 그리고 나의 경력이 쌓여갈수록 아이들 짐도 많아졌다. 방 하나짜리 집의 거실에 아이들 물건이 흘러넘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1층 커플에게 눈치가 보일 무렵 집주인은 월세를 올렸고 우리는 당연한 수순처럼 새로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월세를 올리다니, 집주인의 욕심이 징글징글했다. 집을 보러 올 때 첫째 아이만 데리고 왔었는데 나중에 우리 가족이 넷인 걸 알고 좋지 않은 소리를 했다는 말을 신랑에게 뒤늦게 전해 들은 터라 마음도 불편했다.
애초에 옵션이 많지 않았다. 왕성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두 아이를 생각해 1층 집이어야 했고 우리의 예산 내에서 방 2개짜리 집은 무리였다. 당시 살던 동네는 방 한 개짜리 집들이 죄다 좁았기에 조금 더 멀리 가야 했다. 조금씩 반경을 넓혀 간신히 방 하나짜리지만 방 2개짜리 집이나 다름없는 곳을 찾았다. 1929년에 지어진 6층짜리 아파트의 1층 집이었다.
이삿날, 옆집에 살던 한국인 언니가 우리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옆집에 한국인이 살던 게 미국 와서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울컥했다. 떠나고 싶지 않은데 떠나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 목 언저리 어딘가에 걸린 게 분명했다. 이제 발코니에 나갔다가 우연히 옆집 언니가 뒤뜰에 나와서 책 읽는 모습을 볼 수도 없을 터였다. 이 집으로 이사 온 날 기꺼이 도와준 한국인 지인들로 잠시 북적댔던 발코니도, 엄마가 그들을 위해 전날부터 떡을 만든다고 수선을 피우던 모습도 전부 한 시절로 물러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아랫집에는 복층 구조에 젊은 백인 커플이 살고 있었다. 그때는 그들이 정말 많이 부러웠다. 집주인은 그 집에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불렀을 테지만 옆집 언니의 제보에 따르면 그들은 그 후로도 그 집에 오래 머물렀다고 했다. 비싼 운동 장비를 들여놓으며 코로나 시대를 보냈다고.
나보다 좋은 집에 사는 이들을 향한 질투 비슷한 감정을 삭이는 연습, 그건 우리가 집이라는 공간에 사는 이상 평생 반복하게 될 연습이다. 나보다 부자인 사람도, 나보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도 넘쳐나므로 그때마다 꺾이지 않을 단단한 심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날의 나에게는 그런 심지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껏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그 편이 애써 부인하는 것보다 속편 했다. 그들과 나의 다름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우리 가족을 받아준 새로운 집으로 일단은 씩씩하게 들어갔다. 아이 학교와 많이 멀어졌지만 운동 삼아 하루 40분 걸으면 좋지 뭐, 자조석인 웃음을 지으며. 그것만이 내가 감당하면 되는 문제라고 착각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