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의료 체험기

by 물고기자리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산모 앞으로 얼마의 비용이, 또 아이 앞으로 얼마의 비용이 청구된다. 눈도 못 뜬 아이 앞으로 청구되는 의료비는 그 후에도 한 사람의 생애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삶이란 집세, 가스비, 핸드폰비, 교육비 등등 수많은 비용을 부담하는 활동의 연속이겠지만 그중 우리의 간담을 가장 서늘하게 만드는 비용이라면 단연 의료비다.


미국은 한국처럼 의료시스템이 체계적이지 않다. 국민건강보험 덕분에 모두가 비슷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민간의료보험 밖에 없으며(65세 이상 혹은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제공되는 메디케어, 일정 소득 이하의 저소득층에 제공되는 메디케이드 제외) 보험에 따라 보장받을 수 있는 질병도, 범위도 다 다르다.


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경우 맹장수술에 대략 8만 달러, 출산에 5만 달러의 비용을 부담하기도 하지만 비싼 보험비 때문에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고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도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숱하다. 보험회사에서 온갖 사유를 들며 거절 통지서를 보내기 때문이다. 거절 실적이 높을수록 수당이 높아진다는 보험회사 직원의 고백이 씁쓸하다.


미국 생활 9년 차. 의료보험 없이 살던 시절을 지나 매달 비싼 의료비를 내며 병원에는 가지 않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매달 비싼 의료비를 내며 그만큼 비싼 약을 무료에 가까운 비용으로 먹고 있다. 낸 만큼 거둬들이니 지금이 제일 좋을 수도 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안 아픈 게 최고다. 큰 병에 걸려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를 끊는 경우가 주위에 허다하다.


하지만 미국에 살겠다고 결심한 이상, 부당한 시스템에 불만을 잔뜩 품은 채 지낼 수만은 없다. 이곳의 의료 시스템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언론에서 자극적인 문구와 함께 증거 자료로 제시하는 청구액만 볼 게 아니라 이 청구액 가운데 내가 부담하는 비용이 왜 때로는 0이 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따져 묻기라도 할 수 있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무조건 안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혼란스러운 시스템의 이면에는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던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한 의사들이 있고 바쁜 하루에도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유쾌한 간호사가 있다. 의사가 하루에 맞이하는 환자 수가 50~60명이나 되는 한국과 비교해 의료 서비스의 질도 좋은 편이다.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하는 서비스에만은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가구 소득과는 관계없이 일정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이 누군가에게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도,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처럼 어느 한쪽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서로 다를 뿐이다.


두 번의 출산 때문에, 그리고 오랫동안 앓아온 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원과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단순 금융 상품이라는 말이 이제야 비로소 와닿는다.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나니 어렵다고, 굳이 알고 싶지 않다고 한발 떨어진 채 지켜봤던 상황들이 이곳에서 적응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절차일 뿐임을 알겠다.


낯선 이국에서의 생활은 뭐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그걸 겪어내야 하는 곳이 우리가 한없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병원이라는 특정한 장소일 경우 섬뜩함은 증폭된다. 낯선 언어는 더 낯설게 들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어색한 언어가 상대의 귀에 얼마나 정확히 가닿을지 늘 긴장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왠지 궁금했던 것도, 한국이었다면 물어봤을 질문도 삼키기 일쑤다. 상대의 반응을 먼저 지레짐작하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는 나는 누가 봐도 약자다. 돌아보면 한국에서도 나의 부당함을 소리 내어 말해본 경우가 드물었다. 논리적인 말보다 울컥하는 감정이 앞서 나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해보지도 못한 채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가 흔했다.


이곳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나는 늘 근본을 알 수 없는 억울함을 기본으로 장착한 채 병원을 찾는다. 의료진과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병원이 편해졌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 앞에서는 또다시 움츠려든다. 자존심을 다치고 싶지 않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어색한 상황을 대충 얼버무린 채 넘어갈 때도 있다. 미국에 사는 한 평생 반복하게 될 연습이다.


그럼에도 이해해 보려고, 최소한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뿌연 안개 같은 풍경에 덜컥 뛰어든 순간들이 있었다. 꾸준히 천천히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던 순간들, 이방인으로서 겪은 남모를 가슴앓이의 순간들을 모아봤다. 적고 보니 알겠다. 슬픔과 충격, 경악뿐이었다 생각했지만 그 안에는 기쁨, 설렘, 안도도 있었다는 걸. 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 모든 경험이 그러한 것처럼.


* 개인적인 경험일 뿐, 미국 의료 시스템의 모든 측면을 반영한 기록은 아님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