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출산을 끝으로 병원과는 당분간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은 6개월에 한 번씩 갖는 정기 검진, 1년에 한 번 받는 초음파 덕분에 나름 잘 관리되고 있었다. 산부인과는 1년에 한 번 찾으면 되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가던 병원을 거의 1년 만에 방문한 날, 집으로 돌아와 검사 결과를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간수치가 말도 안 되게 급증해 있었다.
“일단 약부터 먹어야 해. 처방전 보낼 테니까 당장 주문해.”
담당 의사가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한국에서 어떻게 끊었던 약인데 다시 먹어야 하나 싶어 잠시 멍해졌다. 수화기 너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그녀가 말했다.
“당황스러운 거 알아. 뭐 특별히 피곤하거나 그런 거 못 느꼈니?”
두 아이를 매달고 집에서 일하는 일상은 ‘피곤’이라는 한 단어로 그리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고만 답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본능적으로 한국에서의 의료 경험과 비교하게 된다. 일단 한국에서는 검사 결과가 그렇게 빨리 나오지 않았다. 다음번 의사를 보러 갈 때에나 검사 결과를 알 수 있었고 그 결과에 따라 약을 처방받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매 번 3달이나 늦은 상태에 맞춰 처방을 받았었다.
미국 의사의 신속한 조치에 살짝 놀랐다. 그는 병원 방문 날짜를 예약하되 일단은 약부터 복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나는 의사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을 재빨리 받아 적었다. 100퍼센트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요지는 이랬다.
특수한 약이라 일반 약국에서는 처방받을 수 없다는 것.
그곳에 처방전을 보내놓을 테니 전화해서 바로 주문하라는 것.
그곳은 어디이며 약값은 또 얼마인지 내 머리가 바삐 돌아가는 사이, 의사가 덧붙였다.
“네 보험회사에서 얼마나 커버가 될지 모르겠다. Co-payment Card*를 발급받으면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 그것부터 신청하고.”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어리둥절한 상태로 일단 의사가 말해준 약국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가 Co-payment Card 발급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만 몇 가지 입력하면 번호가 발급되는 꽤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다시 약국에 전화해 발급받은 번호를 알려준 뒤 전화로 약을 주문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비용을 부담하며 먹던 약이었다. 한국에서는 회사에 환급 신청을 통해 본인부담금을 돌려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만 부담하면 되었었다. 단단히 각오를 하며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데…
“고객님께서 부담하실 비용은 ‘0’ 달러입니다.”
“Really?!!!”
잘못 들었나 싶었다. Co-payment Card만 발급받았을 뿐인데 700달러가 순식간에 0달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제약 회사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나는 비싼 약을 공짜로 먹는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을 다시 복용해야 한다며 우울했던 내가 공짜 약을 받는다는 말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그 돈은 우리 가족이 한 달에 내는 보험료와 얼추 비슷했다. 그동안 꼬박꼬박 비싼 보험료만 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드디어 혜택을 보는 건가 싶었다. 해외생활을 하며 느낀 온갖 억울함이 조금은 가신 느낌도 살짝 들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1년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 Co-payment card란?
제약회사에서 제공하는 약값 지원 프로그램으로 약마다 1년 한도가 다르다. 소진된 한도는 매해 1월 다시 채워진다. 내가 비싼 약을 무료로 먹을 수 있었던 건 이 프로그램 덕분. 제약회사에서 약값을 지원해 준 덕분에 내가 내야 하는 co-pay는 0이었다. 단 보험에 가입한 사람만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결국 보험회사와 제약회사가 비용을 함께 부담하는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