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남은 약: 9알)
매달 중순 쯤 되면 약을 리필(refill)하라고 문자가 왔다. 이번에도 공짜겠지 생각하며 주문창을 여는데 뭔가 이상했다. 새로운 처방전이 발급되었다는 둥 시작부터 조금 싸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하란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면서도 별일 있겠나 싶어 신용카드 번호를 순순히 입력했다.
순간 화면에 숫자가 떴다.
“$705”
그 숫자를 한참을 노려보다가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상담사는 친절하게도 내가 그 동안 사용한 Co-payment Card의 1년 한도가 소진되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내가 복용하는 약의 경우 제약회사에서 지원하는 카드의 한도가 5,000달러라고 했다. 1월부터 8월까지 약을 구입하느라 이미 다 소진해버렸으니 이제 생돈을 내야 할 판이었다.
처음 듣는 정보에-아니 알려주었겠지만 공짜 약을 받는다는 생각에 신이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을-당황한 나에게 직원은 추가 재정 지원이 있을 수 있으니 Co-payment Card 담당 부서에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그쪽에 전화하니 직원은 “Your Co-payment card has been exhausted.” 라는 같은 말을 반복했고 추가 재정 지원과 관련해서는 화요일 아침 제약 회사에 직접 전화해 물어보라고 했다. 하필 미국의 노동절이 낀 긴 연휴였고 그 바람에는 속절없이 며칠을 흘려보내야 했다. 약통을 열어 남아 있는 약을 세어보았다. 아홉 알이었다.
화요일(남은 약: 5알)
화요일 아침, 제약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나의 사정을 다 들은 직원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free drug program을 지원해 보세요. 제가 가르쳐드리는 사이트에 들어가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5분이면 작성할 수 있어요.”
“결과는 언제 나오죠? 약이 다 떨어져가서...”
“걱정 마세요, 빠르면 목요일에 나올 거예요. 결과가 나오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하지만 그가 읊는 정보는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작년 세금 정산 내역, 소득 증명 내역 등등. 걱정하는 나의 목소리를 감지한 그가 말했다.
“복잡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제 말을 믿으세요. 진짜 별 거 아니에요. 제가 가르쳐드리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정보를 입력하고 관련 서류를 업로드한 다음에 기다리기만 하면 되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제가 꼭 연락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는 친절했지만 시종일관 엄청난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자꾸 듣다보니 그의 속도에 익숙해지는 것도 같았다. 이 와중에도 영어실력은 꾸준히 향상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막상 들어가 정보를 입력하니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남편에게 부탁한 서류 몇 장과 함께 의료보험 카드의 앞 뒤 사진을 찍어 업로드했다. 약속한 목요일이 되었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남은 약은 다섯 알 뿐이었다.
금요일(남은 약: 2알)
금요일이 되자 친절한 그 남자가 아니라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제출한 서류 가운데 병원 측 추가 정보가 필요해서 병원으로 서류가 넘어간 모양이었다. 병원에서는 내가 채워야 하는 부분이 있으니 메일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내용을 채워서 다시 메일을 보내면 자신들이 다음 주 월요일에 제약회사에 팩스를 다시 보내겠다고.
‘왜 지금 보내면 안 되는데?’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5시 퇴근을 칼같이 지키는 이곳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시계는 아직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월요일(남은 약: 0알)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고 월요일 아침, 하루에 한 알씩 먹던 약이 드디어 바닥나고 말았다. 텅 빈 약통을 바라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숨겨둔 약이 있을지 모른다며 가방을 뒤져봤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하루 정도 거르는 건 괜찮을 거야. 깜빡하고 하루 거를 때도 꽤 있었잖아.’
약을 당일 배송으로 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으므로 일단 프로그램 신청 결과를 기다려보자 생각했다. 하지만 지원서가 거절될 수 있는 변수도 고려해야 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일단 약을 주문하기로 했다. 당일 배송으로 받아야 했으므로 또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705달러 중 보험회사에서 커버되는 금액을 제외한 644달러가 청구될 예정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수화기 너머 콜센터 직원이 강한 인도 억양으로 물었다.
‘그래 알고 있다. 뭐 어쩌라고? 당신이 보태주기라도 할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사회적 자아를 장착한 채 공손하게 알고 있다고만 답했다.
약을 주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제약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나의 지원서가 거절되었다고. 수입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4인 가족이 뉴욕에서 먹고 살기 빠듯한 수입이건만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지만 우리보다 가난한 사람이 미국에는 차고 넘쳤다. 친절한 직원은 patient advocate foundation라는 또 다른 방법을 언급하며 지금은 자금이 바닥났지만 채워질 때가 있으니 수시로 연락하면 좋을 거라 말했다. 휴-
분노와 상심, 좌절, 수용을 거쳐 곧바로 현실 자각이 찾아왔다. 약값을 벌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책을 번역해야 했다.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리고 와 욕조에 넣어둔 뒤 컴퓨터 앞에 앉아 번역 파일을 열고 있는데 의사에게 전화가 왔다.
“미안, 내가 휴가 다녀온 동안 난리가 나 있네.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너가 신청한 그 프로그램 거절됐어.”
“응 들었어, 뭐 어쩔 수 없지.”
“약은 지금 얼마나 있는 거야?”
“없어, 그래서 일단 644달러 내고 주문했어.”
“뭐? 맙소사, 안 돼, 당장 취소해.”
“뭐라고?”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