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그 약 말고 조금 더 저렴한 약으로 바꿔보자고 했다. 정녕 그래도 되는 건지,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지만 그러건 말건 의사는 벌써 새로운 약의 부작용을 읊고 있었다.
신장기능 저하, 골밀도 감소.....
“네 보험으로 얼마나 커버되는지 알아보고* 처방전 보낼 테니까 일단 주문한 거 취소해. 취소할 수 있지?”
“수요일까지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아마 취소될 거야.”
전화를 끊고 곧바로 약국에 전화해 주문을 취소했다. 그리고 의사가 말한 약을 검색해 보았다.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이렇게 갑자기 약을 바꿔도 되는 건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의사 말대로 곧바로 약을 바꾸기로 한 건 그동안 충분한 대화를 나눠온 의사를 믿기 때문이었다. 나의 담당의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뉴욕의 대표적인 종합병원인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이다. 이 병원에서는 마이차트라는 곳에 접속하면 의사와 언제든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시스템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서 병원에 다닐 때에는 이러한 시스템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의사 앞에 서면 죄인마냥 3분가량 일방적으로 결과를 통보받고 쫓기듯 진료실을 나오곤 했다. 의사들은 질문이 있냐고 묻긴 했지만 막상 질문을 하면 내가 다 잘 알아서 하는데 네가 뭘 아냐는 듯한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안 그런 의사들도 있을 테지만 내가 경험한 의사들은 대체로 그랬다.
이곳의 의사들은 달랐다. 널찍한 의사 방에 환자들이 들어가는 대신 환자들이 있는 방으로 의사가 찾아왔다. 의사의 개인 사무실 따위는 없었다. 나의 담당의는 75세의 노의사인데도 권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갈 때마다 손자뻘 되는 젊은 의사들과, 또 환자들과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는 그는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 덕분에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다 들었다. 좋은 의사의 조건으로 묘사되는 공감능력과 회복력을 겸비한 딱 그런 의사였다.
각기 다른 색으로 페디큐어를 하고 간 날 그걸 알아봐 주기까지 한 의사는 의사들을 향한 나의 해묵은 감정과 편견을 단번에 박살 내주었다. 내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며 언제든 치료를 시작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늘 경고했기에 약을 먹기 시작한 1년 전 그날처럼 나는 오늘도 비교적 차분하게 다른 약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길, 의사가 처방전을 보냈다던 동네 약국으로 약을 찾으러 갔다. 약값이 너무 비싸게 나오면 다른 약으로 바꿔줄 테니 말하라는 의사의 말이 있었기에 비교적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혹시 몰라 인터넷으로 잔뜩 쿠폰을 출력해 두었다. 이번 약은 기존 약과는 달리 인터넷으로 쉽게 출력할 수 있는 쿠폰이 많았다. 아무리 쿠폰의 나라라지만 약도 쿠폰으로 할인받아먹는 나라라니, 살짝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약사는 나의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약값부터 말해주었다.
“13.02달러입니다. 보험회사에서 커버되었어요.”
그 사람도 보았겠지, 마스크 너머 나의 안도하는 표정을. 그 사람은 그런 표정을 하루에도 수십 번 볼지 모른다. 약자의 마음을 잘 알기에 과한 친절이 몸에 배었을지도. 처방전을 보니 의사가 처방한 약은 제너릭 의약품(오리지널 약품을 모방하여 만든 복제약으로 약값이 저렴하다)이었다. 저렴한 이유였다.
가져간 물에 약을 넘긴 뒤 마이차트에 접속해 의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사히 약 받아왔어. 13달러 밖에 안 하네.”
의사는 잠시 후 답을 보내왔다.
“잘됐네. 90일 치 처방전 보내놓을게.”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이제는 골밀도 감소에 대비해 비타민 D도 잊지 않고 챙겨 먹고 있다. 40대에 접어드니 이곳저곳 쑤시지 않은 곳이 없지만 가장 큰 위험은 보이지 않는 곳에 도사리고 있단 걸 늘 명심하며 산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매일 아침 약을 먹을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이 약을 얻어내기까지 벌인 전쟁을. 전쟁이 별 건가. 불투명한 막 너머로 의도치 않게 리스닝 실력을 향상해 가며 상대와 영어로 수십 건이 넘는 통화를 했던 그때가 내겐 진짜 전쟁이었다.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전 상태이지만.
* 앞서 언급했지만 미국은 개개인이 각자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보험마다 보장 범위가 다 다르다. 똑같은 서비스를 받고 똑같은 약을 처방받아도 내가 가입한 보험에 따라 커버되는 비용이 다르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약관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그걸 일일이 계산해 볼 수도 없다.
결국 병원과 보험회사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다 보니 병원이나 의사가 각자의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원하는 만큼 의료비를 청구하고, 보험회사는 자신들이 커버하는 비용이 이만큼이나 된다고 선전하며 가입자를 유치한다. 그들이 벌이는 장사노름의 대가는 오롯이 환자가 치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