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글을 뜸하게 올렸더니 브런치에서 알람을 보낸다. 일상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을 차분하게 글로 정리하는 '브런치 타임'을 가져보라고. 나의 요즘 관심사는 뭐냐고. 그래, 나도 안다. 브런치 타임이든 뭐든 요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단 걸. 하지만 두 아이가 방학한 지금은, 그 방학이 2달 넘게 이어지는 지금은 나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시간인 걸 어쩌랴. 그래서 아이들이 깨어나 나의 하루를 자신들의 색깔로 물들이기 전에 책상 앞에 앉았다. 감정과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그런데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지금이 그럴 때인지 곧 깨어나 엄마를 찾으며 당장 자신 옆에 누울 것을 강요할 둘째의 찡그린 미간이며 오동통한 팔다리만 떠오를 뿐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신호일까. 나의 뇌세포가 양육자의 그것으로 가득 차 버린 걸까. 누구보다도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 내가?
보다 솔직해지자. 그렇다, 난 이 시기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만큼 이 시기가 지나는 걸 아쉬워하고 있다. 예전 사진과 비교하면 완전히 아기티를 벗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만 어린애 단계에 있는 첫째 아이와 아기 시절을 벗어나 귀여움의 막차를 탄 둘째 아이. 지금은 내 주위를 위성처럼 맴도는 이 두 아이가 눈 감았다 뜨면 어느새 궤도 밖으로 벗어나 있을까 봐 두렵다.
한국말부터 배운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엄마를 제외한 모든 말에서 영어가 먼저 나온다. 내가 낳았지만 어쩐지 조금 낯설다. 시설에 보낸 것도 아니고 네 살이 된 작년부터 Pre-K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첫째 보랴 일하랴 살림하랴 바쁜 엄마가 누나보다 티브이 이를 많이 보여줘서 그런가. 혼자서 영어 단어를 주워 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어려운 단어도 내뱉을 줄 안다. 얼마 전에는 학교에서 global warming을 배워와 나에게 영어로 한참을 설명하기까지 했다.
이 아이는 사랑고백도 영어로 한다. 내가 한국말로 “사랑해” 해도 “I love you.” 한다. 그런데 기분이 묘하다. 내 아이에게서 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사랑고백을 받는 일은 은근히 설렌다. 아이는 한국어를 조미료처럼 섞어 말하기도 한다. "Please 뽀뽀 me."처럼 말이다. 예전에 영어랑 한국어를 섞어 쓰는 누군가를 보면 솔직히 조금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아이 입에서 나오니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한국어와 영어가 혼재된 아이의 뇌를 들여다보고 싶어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내달린다.
미국에서 태어나도 한국어를 곧잘 하는 아이들을 배출한 가정의 공통점인 "집에서는 한국어만"이라는 규칙을 고수하고 싶으나 자신의 속도대로 나름의 언어 발달을 이루고 있는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제대로 된 모국어 없이 커서 결국 영어도 어느 단계 이상으로 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독한 마음도 품어보지만 밖에서 응가가 마렵다고 동동거리는 아이가 똥꼬에 힘 팍 주며 집에 겨우 도착해서는 "차맜어. 응가 차맜어."라고 어눌한 발음으로 나름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내뱉을 때면 아무리 독한 마음도 여름 태양 아래 선 아이스크림마냥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김하나 작가의 어머니가 쓴 육아일기장을 본 뒤 늦었지만 나도 육아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게 작년 이맘 때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10장을 채 넘기지 못한 채 정체 상태에 머문 두꺼운 일기장들.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두꺼운 일기장을 아이들 각자 이름으로 하나씩 장만했을까. 그 일기장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덜컥 겁이 났다. 아이들이 더 커서 아무 때고 사랑고백을 하지 않게 되면 어쩌지. 그런 날은 생각보다 금방 올 테고 몰캉몰캉한 말들은 이제 비수가 될 만큼 날카로운 말들로 대체될 텐데. 낯간지러울 만한 말들을 지겨울 만큼 반복적으로 듣지 못할 때가 오기 전에 남겨둬야 한다. 지금의 호시절을.
내가 아무리 준다 해도 아이들의 사랑이 늘 더 크다. 그리고 앞으로의 기록들은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