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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9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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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Oct 29. 2019

다시 오는 아침에 눈을 뜨면 웃고프다

줄곧 듣던 노래가 달라지던 순간

어떤 노래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이나 감정이 바뀔 때가 있다. 나는 특히 이 노래가 그랬다.



선공개되자마자 들었을 때는 노래로 모놀로그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은데 낯설기도 하고. 당시 박효신 콘서트는 가도 소울트리는 아니었던-입덕해도 팬클럽 가입은 안 하는 소신 있는(?) 덕후였음- 나는 이 노래를 혐생 퇴근송으로 듣곤 했다. 지침과 빡침으로 점철된 하루가 끝나고 이 노래를 들으면 위로받는 것 같아서.


시간이 흘러 지금 이 노래는 여전히 위안이 되면서도, 드문드문 내가 절대 못 잊을 하루의 어떤 순간과 감정을 상기시키는 노래가 됐다.


2년 전 삼일절 낮이었다. 벼르고 별렀던 휴가를 떠나기 전날이었는데 동생이 울면서 전화를 했다. 동생은 아빠가 쓰러지셨다고 했고, 난 일단 울지 말고 병원에서 보자고 동생을 달랬다.


내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동생은 먼저 엄마를 만나 상황을 전해줬다. 내려서 응급실로 뛰어갈 때는 처음 발표를 해봤던 날 수준으로 심장이 쾅쾅 뛰었다. 그러다 응급실 접수처에 계신 엄마를 보고 금세 차분해졌다. 진정되었다기보다는 서늘하게 싹- 식는 쪽에 가까웠달까.-지금 생각해보니 장녀 DNA가 발현돼 침착해졌던 듯- 엄마는 후리스 홈웨어 차림이셨는데 얼마나 경황이 없으셨는지 슬리퍼도 짝짝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빠는 심근경색이셨다. 평소 어디가 안 좋으셨던 것도 아니고 그날 갑자기 그렇게 쓰러지셨다. 엄마 곁에서 벙쪄있는데 현실적인 고민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출국이라 환불은 안 되겠지만 비행기랑 호텔은 캔슬해야겠지, 아빠가 장기 입원하시면 병원비는 어쩌지, 병간호 스케줄은 엄마/ 나/ 동생 삼교대로 짜면 되나 등등. 생각하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돌아가신 친할머니도 아빠도 꼭 내 휴가 D-1 때 그렇게 되셨으니까. 두 분 다 나와 쌓은 엄청난 애증의 역사를 이렇게 푸시는 건가 싶어, 친가 사람들은 어떻게 휴가를 그냥 보내주질 않냐는 못된 말도 읊조렸다.


계속 기다리다 아빠의 스텐트 시술이 끝나서 담당의 선생님을 만나 설명을 들었다. 요는 아빠의 의식이 언제쯤 돌아올지 말하긴 어렵고, 한동안 중환자실에 계실 테니 가족들도 장기전을 준비하라는 거였다.


주무시는 것과는 달랐던, 의식 없는 아빠의 얼굴. 아빠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스트레처카-의드 대본에서 본 것 같은데 맞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의식 없이 누워 계시던 아빠는 우리 아빠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중환자실을 나오니 이미 밤이었다. 어둑어둑한 병원 로비에 있다가 불현듯 내 지인에게도 알려야겠다 싶어 절친 M양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의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친구의 목소리를 기다릴 때까지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못 받나 보다 싶어 끊으려던 순간 들린 친구의 ‘여보세요’ 소리에 바로 울먹이게 됐다. 그래도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병원을 나와 엄마랑 동생은 집으로, 나는 독립해 나가 살던 원룸으로 갔다. 엄마는 어차피 병원에서도 장기전이 될 거라고 하니 계획대로 휴가를 가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안 편하니 안 가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원룸 청소해두고 짐 싸서 다녀오라며 날 보내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내 원룸에 도착해 청소를 시작하는데 적막이 싫어져 음악을 틀었다. 늘 하던 대로 아이폰에게 임의 재생을 시켰고 몇 곡이 흐른 뒤 ‘숨’이 나왔다. 개판 5분 전이던 방을 치우면서,


다시 오는 아침에
눈을 뜨면 웃고프다


라는 가사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지금은 기억 안 나는 다음 곡, 그다음 곡이 나올 때까지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응급실에서 엄마를 보고 울컥 올라올 뻔한 그게 두려움과 울음이 섞인 뭔가였나 보다.


아빠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 비행기 타면 안 될 것 같은데, 내 반 평생 이상 아빠와 사이가 나빴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빠랑 헤어지고 싶지는 않은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식의 생각을 하며 울다가 새벽까지 캐리어를 싸고 출근했다.


오후 반차를 쓰고 밤 비행기로 떠나는 거라 퇴근하고 아빠를 보고 가려고 했는데, 일 마무리가 늦어져 중환자실 면회 시간을 놓쳤다. 그렇게 인천으로 가 새벽에 싱가포르에 도착했고 호텔에 체크인하려던 때 동생한테 보이스톡이 왔다. 장기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쌔하고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동안은 ‘숨’을 들을 때 그 날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도 가끔은 노래를 듣다가 그때가 떠오르는데 힘들거나 괴롭지는 않다. 여전히 위로와 위안이 되는 노래인데 나만의 사연이 생겨 조금 더 애틋해진 느낌. 살다 보면 자연스레 이 노래에 또 다른 사연이 덧입혀질 텐데 그 언젠가 달라질 이 노래는 어떨까.


일단은 내일도 잘 쉬고, 할 일도 미루지 말고 해치우고, 그렇게 잘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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