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 엄마의 한과 행복

세 번째 엄마 이야기

by 지모신

1. 못 배운 한 - 엉엉 운 엄

중학교 때까지 나의 과외선생님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7시 땡 치면 귀가하셨고 술, 담배도 하지 않으셨고 집에 오면 저녁 드시고 신문을 보셨다. 그러고 나서는 내 공부를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학교 선생님의 설명이 아리송한 했던 부분도 아버지 설명을 들으면 귀에 쏙쏙 들어갔다. 중학교 과정의 수학, 화학, 물리도 다 아버지 설명이면 얼추 다 이해됐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교회 종지기인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공부는 1등을 놓치지 않으셨던 거 같다. 워낙 가난했고 학용품을 사서 쓴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 상을 받아서 썼다고 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도 한동안 학교에 남아서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전쟁통 일제강점기 여서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그러고 나서는 병원의 행정 사무원으로 취업을 했다. 공부를 잘했어도 가난해 중학교는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학교 교과만이 아니고 축구와 야구 게임 보는 법도 종이에 그림을 그려 가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아버지는 수업시간에 선생님 눈과 소리에만 집중하면 평균은 한다고 말씀하셨다. 수업시간에 딴짓하고 나중에 공부하려 하지 말고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께만 집중하라 했다. 나는 아버지 말 그대로 했다.


자기 아이들은 가르치기 힘들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나를 가르치면서 한 번도 원성을 높인 적이 없다. 아버지 설명은 늘 선생님보다 더 자상하고 친절했다 일대일 과외였으니 ~


내가 5학년 말일 때 노량진(4~5학년은 용산에서 노량진으로 이사가 살았다)이 학군이 안 좋다며 우리는 다시 급하게 청계천으로 전세로 나와 살다 노량진 집이 팔리자 종묘 담이 우리 집 뒷마당 벽인 종로구 봉익동 한옥집을 샀다.


봉익동 집에서 살 때, 내가 중학생 때 일이다. 그날도 아버지는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소리 내서 엉 엉 울기 시작했다. 사연인즉 엄마는 한 번도 그렇게 할아버지에게서 자상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아버지가 나를 가르치는 정겨운 모습을 보고 그렇지 못했던 자기의 유년 시절이 서러워서 울음이 터진 거였다. 할아버지가 나와 6년 터울의 막내 이모의 애교에는 웃으시면서 놀아주던 기억이 난다. 막내에게 보여준 자상함을 큰 딸에게는 왜 못 보여주셨는지~


엄마는 해방 전에 가족이 만주에서 살았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마술을 했고 아마도 서커스단에 있었던 거 같다. 그러다가 해방되면서 남한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졸업하고 살림을 도와야 된다고 초등학교 2학년 입학생을 5학년으로 월반을 시켰다. 아무리 교과서를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2학년 아이를 5학년에 월반시켰으니 어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성적표를 받으면 모든 과목이 양, 가였는데 미술만은 수였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했는데도 미술이 '수'였으면 엄마가 얼마나 그림에 재능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재능은 내 막내 동생이 물려받았다. 막내 동생은 학교도 안 간 어릴 적에도 연필이나 색연필로 벽에다가 마구마구 그림을 그렸다. 한 번은 이순신 영화를 보고 왔는데 군복 입은 이순신의 모습을 얼마나 정교하게 그려 놨는지 나도 놀란 적이 있다. 동생은 이 재능을 살리지는 못했다. 이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동생이 그 옛날에 자기 재능을 되살려 이제 그림을 다시 해보면 어떠냐고 말해볼까 싶다.



2. 엄마가 가게 나가면서 행복했던 시


아버지는 노점상을 청산하고 남의 집 가게 한 구석을 빌려 전선을 팔다 드디어 세운상가에 점포를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청계천으로 이사를 왔다. 청계천 골목 동네 한옥에서 전세를 1~2년쯤 살다 종로 봉익동에 집을 사서 이사 왔다. 엄마도 가게를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가게를 나가면서 은행 일을 보아야 했고 그때는 돈을 찾을 때 출금증을 써야 했는데 찾는 금액을 한자로 써야만 했던 거 같다. 아니면 한글로 써도 됐는데 자존심 강한 엄마가 한문으로 쓰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엄마는 숫자를 한문으로 쓰는 연습을 한동안 했다. 엄마는 이 연습을 하며 행복해했다. 아버지는 이때 엄마가 같이 장사를 해줘서 우리들을 다 대학교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장사 수완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공장에 물건 값 95만 원을 줘야 한다면 엄마는 살림 사는 여자들이 장에서 흔히 물건 값을 깎듯 5만 원은 깎자고 하면서 90만 원만 보내는 식으로 장사를 했다고 한다. 남자인 아버지는 이런 수완이 없었고 엄마의 이런 능력을 대단하게 인정했고 이 셈법이 자산을 일구는데 큰 기여가 됐다고 인정한 거다. 엄마가 있으니 가게 점원을 두지 않아도 됐고 월급이 나가지 않은 거고 그만큼 수입이 늘어난 것도 재산을 불리는 데 도움이 된 건 당연하다. 몇 해 전 없는 중고가 없다는 황학동에 물건을 사러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가게 주인들이 여자들이 수두룩했다. 엄마를 보는 듯했다. 우리 엄마들이다


3. 오진으로 키운 병


아버지 엄마가 가게에 나가 아버지와 함께 점포를 운영하던 시절은 엄마한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의 병이 깊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은 내가 4~5학년 노량진에 살 때. 엄마가 살이 많이 쪘었다. 그게 살이 찐 게 아니고 사실은 몸이 부은 거였다. 그때부터 병원을 다닌 거로 아는데 병원에서 위장병이라고 해서 위장약만 몇 년을 먹은 거다. 어느 날 엄마가 쓰러졌다. 그래서 큰 성모병원에 입원했는데 신부전증이고 7개월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은 개인병원에 다녔는데 그 병원에서 위장병으로 오진을 해서 몇 년 동안 위장약만 먹었던 거다. 요즘은 신부전증은 혈액 투석으로 계속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살 수 있지만 엄마가 돌아가실 즈음해서 이 투석이 처음으로 나온 거 같다. 엄마는 투석을 몇 번 받기는 했는데 그게 막 나온 때라서 한번 받는 게 굉장한 고가였고 효능도 지금보다 떨어졌던 거 같다. 그렇게 해서 엄마는 1년쯤 살다 돌아가셨다. 한창 살 재미를 느낄 때쯤, 정말 꽃다운 나이에 엄마는 두고 가기에는 눈이 안 감기는 자식 셋을 남기고 그렇게 돌아가셨다. 이렇게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은 늘 마음 한편에 어둡고 슬프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마음이 편안해진 때는 쉰 살 너머 내가 원불교를 다니면서 합동 천도재에 엄마 이름을 올려 천도재를 지내고 나서다. 일주일 천도재가 끝난 날 내 평생 최고의 꿀잠을 잤다. 얼마 전 '이번 생도 잘 부탁해'라는 드라마를 봤는데 거기서 주인공은 전생을 기억한다. 그리고 전생의 인연들이 현생에서도 이어진다. 그 드라마를 보며 내 가까이 어딘가 그 누군가로 엄마도 살아가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움이다. 엄마 이름은 노영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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