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29년 태어나셔서 1991년 5월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고향은 평양 강동군 강동면 용복리이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부재한 아버지였다. 1년에 몇 번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오는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 가난해서 부잣집 머슴살이를 했던 건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아버지는 종지기 할머니와 고모와 교회에서 사셨다. 고모 이야기는 별로 들은 바가 없다.
아버지의 신앙심은 매우 돈독했다. 내 어릴 적 아명을 '마리아'라고 했을 정도로. 그러나 교회는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야 영락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6학년 때쯤인 거 같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교회에 가서 봉사할 수 있을 때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셨었다. 그 말 그대로 하셨다. 교회에 다니시면서부터는 집사가 돼서 열심히 심방을 다니셨다. 그 심방으로 찾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종로 근처에 사는 매매춘 여성들도 있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 언젠가 한 번은 아버지가 이들에게 그 직업을 합법화해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줘야 된다고 했다. 그래야 그녀들이 포주들로부터 뜯기지 않고 스스로 돈을 모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유럽의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는 매매춘이 합법이어서 매매춘 합법화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담론 자체가 금기시되는 면이 있다. 매우 어려운 논쟁적인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암튼 이런 논의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종지기 할머니와 사는 아버지 가족이 너무 가난했던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행히 공부를 잘해서 학용품은 학교에서 다 상을 받아서 썼다고 한다.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를 예뻐해 주셨다는 말을 했다. 일본인 선생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의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일본인이라고 다 나쁜 건 아니니까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거 같던 거 같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가난해서 중학교에 갈 수가 없었고 잠시 그 학교에서 1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병원 사무원으로 오래 근무하셨던 거 같다.
아버지가 남하하신 거는 정말 우연히 계획에 없던 일이다. 1.4 후퇴 때 군인들의 산 넘는 걸 하루만 도와주기로 하고 할머니가 싸 주시는 떡 한 덩이를 갖고 군인들과 산을 넘었다 그리고는 다시 집으로 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산소에 가서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찬송 '내 주여 뜻대로'를 부르며 가족을 다시 보지 못하는 한,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은 건지가 비로소 조금 가늠되는 듯했다. 이해하기도 감당하기도 힘든 절대적인 고통을 어찌 이겨낼 수 있을까? '주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절대 체념, 신앙이 유일한 의지처일 수밖에...
남하하셔서는 갈 곳이 없어서 바로 군대에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행정병이셨는데 6.25 전쟁 막바지에 행정병으로 어떤 공을 세우셨는지 훈장을 무공 훈장과 화랑 무공 훈장 두 개나 받으셨다. 아버지 역할로 국지전 전투를 이길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지독한 성실성이 군대에서도 발휘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제대하고는 위문편지를 보내온 여자 아이 집에 가서 신세를 조금 졌다. 그리고는 청계천에서 어찌어찌 고물상 노점상을 시작했고 고물상에 물건을 팔러 온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눈여겨봤고 엄마와 결혼시켰다. 결혼과 아이의 출산이 이 두 분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을지 충분히 가늠이 된다. 혈연 단신 아버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이 생겼고 똑똑하고 자존심은 강하나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해 자기 인생에 아무 희망이 안 보여 장충단 공원에 가서 자살을 시도했던 엄마에게도 인생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으니 이 두 분에게 단칸방은 궁궐과 같이 느껴졌으리라. 이런 두 분에게서 태어난 첫딸이 나이니 내가 받은 사랑은 극진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나는 대로 내가 받은 유별난 사람을 이야기해 보자. 초등 시절은 물론 중학 때까지 아버지는 나의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술 담배를 안 하시던 아버지는 7시 정도면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드시고 신문을 잠시 보시고 내 공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숙제도 봐주고 학교에서 선생님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화학, 물리는 아버지에게서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됐다. 축구 보는 법, 야구 보는 법을 그림을 그려 가면서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의 유별난 사람은 내 이름에서 드러난다. 내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아명은 마리아이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을 내 아명으로 집에서 불렀던 거다. 마리아라고 다정하게 불러 주던 이모들은 미국에 있는 둘째 이모만 빼고 첫째 이모와 셋째 이모는 돌아가셨다. 아직까지도 나는 이모들이 나를 부르던 마리아라는 이름이 생생하다. 또 내 이름, 김정희에서 정희(正熙)는 한자로 박정희와 같은 한자이다. 아버지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6.25 이후 혼란스러운 남한 사회를 안정되게 해 줄 거라고 믿었나 보다. 아버지에게 박정희는 영웅이었고 이 영웅의 이름을 딸의 이름으로 한 것이었다. 나는 이 한자 이름이 창피해서 남에게 말한 적은 없다. 암튼 내 이름의 연원은 그렇다.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를 지지하는 10여% 정도의 극우 태극기 부대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아버지처럼 자기 자녀들에게는 따뜻한 아버지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들에 대한 화를 누그려 뜨려 본다.
나는 지금은 없어진 청계국민학교를 1년 다녔고 용산의 시장통 입구에 있는 일본식 2층집으로 이사 갔다. 그 집은 아버지가 처음 마련한 자가집이었다. 1층은 쌀가게가 있었고 좁은 뒷골목으로 1, 2층 살림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 국민학교를 2, 3학년 다녔다. 여기서 생각나는 일은 동네 큰 애들이 우리들을 이끌고 한강까지 놀러 간 거였다. 그때는 한강가에는 나무들도 있었다. 그 먼 길을 큰 애들 인솔하 동네 애들 십 수명이 놀러 갔던 거다. 학교 다녀오면 막내 동생을 데리고 동네로 데리고 나가는 게 내 일과였다. 그때는 공부, 학원 그런 게 없었다. 참고서는 전과 하나가 유일했다.
다시 노량진에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방 세 칸이 있는 전원주택으로 손색이 없는 집이었다. 마당은 넓어서 엄마가 배추 등 야채를 심었고 앵두나무도 있어서 앵두를 따서 먹었고 앞마당에는 아주 키가 큰 해바라기가 있어서 씨를 한 바가지나 받았다. 까서 먹기도 했는데 우리 집 마당의 계단을 올라가는 장독대는 고아원과 담벼락이 붙어 있었다. 고아원이 지대가 높아서 장독대에서 손을 뻗치면 고아원 아이들과 손이 닿았다. 그 아이들에게 해바라기씨를 주었던 기억이 있다. 집이 넓어서 친구들을 한 10여 명씩 데리고 와서 은행 놀이도 하고 그렇게 잘 놀던 집인데 아버지가 내가 5학년 말에 갑자기 다시 청계천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지금 사는 곳은 학군이 나빠 좋은 중학교가 없다는 거였다. 나는 중학교를 추첨으로 간 첫 세대다. 그래서 집도 못 팔고 부랴부랴 청계천으로 다시 이사를 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아버지가 한 구석을 세 들어 있던 가게 주인의 신혼부부 아들 부부가 살고 있는 빌딩 옥상 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나왔다. 내 중학교 때문에 그 난리를 쳤다. 작은 방 한 칸으로는 우리 다섯 식구가 살기가 어려웠고 집이 잘 안 팔렸는지 다시 한옥 넓은 집의 본청 좀 넓은 건넌방을 세를 얻어 2년쯤 살았다.
그 집은 사랑채는 단칸방을 여러 개 만들어 세를 주고 있었고 모두 다 노점상 등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방 한 칸에서 아기와 부부가 살았다. 심지어 장독대 밑에도 방을 만들어 세를 주었다. 그 작은 방에서는 구멍가게를 하는 할머니와 중학생 손녀 둘이랑 셋이 살았다. 기억은 안 나는데 한 여름을 그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남자들은 마당 수돗가에서 등목을 했던 거 같고 우리는 장독대가 벽이 되어 가리어진 문 없는 부엌에서 찬물을 부어 간단한 샤워를 했던 거 같다. 다른 단칸방 사람들은 어떻게 씻었을까? 이러니까 목욕 가는 건 필수였다. 단칸방들에 비하면 우리 건넌방은 세, 네 배는 넓은 방이었다. 아버지가 주인하고 어떻게 얘기했는지 마루를 반을 칸막이를 하고 그 마루를 내 공부방처럼 만들어 주셨었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딸 공부에 대한 지극 정성을 느낄 수 있다.
1학년 다녔던 청계 국민학교는 없어져서 영희 국민학교를 6학년 1년 동안 다니고 무학여중에 입학하고 나서야 종묘와 담을 같이 하는 봉익동의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또 한 번, 골목 안에 있던 그 집을 나와 차도는 아니지만 차와 사람이 같이 다니는 넓은 길(종묘 정문에서 낙원상가 가는 방향으로 난 길)을 건너 골목에 있는 이층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 집에서 대학을 다녔다.
아버지의 애간장을 녹였을 사건이 터진 건 이 집에서였다. 1980년 대학교 3학년으로 휴교를 하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운동권 학생이 된 나는 아침이면 종로 2가에 있는 타이핑 학원에 등록을 해 놓고 타이프 치러 간다고 집을 나와서는 학원에서 타이프 연습을 하고 바로 종로에서 광화문 시위 현장에 합류했다. 거의 매일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서클 선배인 고은광순 선배가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왔다. 언니는 데모를 하고 제적됐다가 박정희가 죽자 그 해 봄에 복학을 한 상태였고 학교에서 언니랑 나는 운동으로 친해진 게 아니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 언니 남편은 조작된 김대중 내란 사건에 연루된 수배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집에 며칠만 있다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는 너무 놀랐지만 사람을 내칠 수가 없어서 가슴 졸이며 며칠을 있게 했다. 언니 부부가 떠나고 일주일쯤 뒤 아침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나와 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차를 오래 타진 않았으니 아마 을지로나 남산 어디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선배가 어디로 갔냐고 대라고 물고문을 받았고 나는 알았으면 바로 댔을 거다. 그런데 이제까지 나는 내가 그날 오전에 들어가 오후에 나왔다고 생각했다. 아마 며칠 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작년에 친구들이 광주 사태 보상 신청을 하라고 하고 두 명의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동생에게 당시 상황을 보증을 서줄 것을 부탁하면서 물어보니 나는 그날 당일 나온 게 아니라 며칠 만에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당일인지 2~3일 만인가에 나왔고 아버지가 손을 써서 내가 뒤이어 며칠 만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아버지 친한 친구가 장교 군인이었다. 나는 반나절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나 실은 며칠 동안의 물고문으로 나는 절대 공포에 휩싸였다. 집에 와서도 경찰이 다시 나를 붙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당연히 잠도 잘 못 자고 아버지는 나를 당시 명동성당 맞은편에 있던 성모병원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두 달을 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도 매일 꿈은 악몽이었다. 쫓기는 꿈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쫓기는 꿈을 잘 꿨다 나는 그게 내가 바쁘게 살아서 이런 꿈을 꾸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때의 악몽이 아직도 꿈으로 나타나는 거 같다. 그때 이야기는 좀 더 자세하게 따로 정리해 봤다. 아버지 그리고 많은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도움으로 차츰 정상을 회복해 갔다. 아버지가 나를 수일 내로 빼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평생 고문 후유증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정신병자로 살았을 것 같다.
아버지는 평생 잊히지 않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삶의 교훈도 주셨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때면 선생님 말에만 집중해라, 그러면 평균 이상은 한다 딴짓하고 나중에 공부해 봤자 소용없다' 아버지의 이 말씀과 엄마의 '너는 공부를 해야 된다'는 무언의 주술 때문에 아마도 나는 박사까지 했던 거 같다. 세상살이를 할 때 자기에게 절대로 중요하지 않은 거는 져 주면서 살아도 된다고 하셨다. 이 말씀도 마음에 새겨졌다 그래서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핏대 올리고 싸우는 것보다 져주는 게 더 속 편한데'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때쯤이었던 거 같다. 아버지 가게에 들른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청계천 상가에서 전선을 파셨다 이미 그때는 아버지가 큰 회사에 전선 납품을 시작한 단계였던 거 같다. 지금은 전선 공장과 전선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직접 거래를 하겠지만 산업화 초기 70년대 초반만 해도 소박한 수준이었을 전선 공장들을 파악하고 거래하고 있는 건 청계천 가게들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산업화 붐을 타고 아버지 장사도 잘 되기 시작한 거 같다. 이제 아버지 장사가 소소하게 파는 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겨울이었고 한 손님이 전기장판을 만든다며 전선을 사러 왔다. 아버지는 전기장판 만드는 방법을 한 이삼십 분 정도 아주 상세하게 손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전선 가격을 보니 몇 백 원이었다. 그 몇백 원은 아버지가 안 팔아도 그만인 푼돈인데 어쩌면 그렇게 소상히 설명을 해 줄 수 있을까, 순간 아버지를 새롭게 봤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렵게 살아오셔서 전기장판을 사지 못하고 만들려는 이에게 보여준 자상함과 친절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야 되는지 무언의 교훈이 되는 장면이었다.
고2말 2월 겨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종로 대로변에 양장점에 데려가서 빨간 오버를 맞춰 주신 것도 아버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로대로변의 양장점은 가장 비싼 양장점이었을 것 같다.
평생 화라고는 모르고 사시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내게 히스테릭하게 화를 내신 적이 있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해 다니고 있을 때 방에서 리포트를 쓰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쓰고 있는 리포트 용지를 뺏으시더니 손으로 꼬깃꼬깃 뭉쳐서 땅바닥에 내던지시면서 이런 거 하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고 히스테릭하게 화를 내시는 거였다. 당시 아버지는 영락교회 집사였고 나는 이화여대를 졸업하였다. 선을 보기에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몇 번 중매가 들어왔지만 내키지 않았다. 나름 운동권이었던 내가 조건 좋은 남편을 만나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거 같다. 그래서 한 번도 선을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연배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자기 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결혼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의 발작적 화를 접하고는 순간적으로 내가 이 집에서 오래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학원 생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도 없고 방법은 결혼해서 나가는 수뿐이 없었다. 그래서 광순 언니에게 남자를 소개하라고 했다. 광순 언니는 최정순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남편은 이을호 씨로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으나 운동권이어서 제적당했다가 다시 복학한 사람이었다. 당시 해겔 철학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 남자 선후배들이 많았다, 이을호 씨는 집들이로 온 후배들 앞에서 소개할 여자가 있다며 희망자는 손 들라고 했다. 남편이 손을 들었고 그래서 남편을 소개받게 되었다.
나름 배우자의 기준을 분명하게 세우고 있었다. 첫째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향이 같을 것, 둘째 가족만 바라보지 말고 사회를 두루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셋째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사람. 남편은 이 조건에 부합하였다. 그래서 교제를 시작하였다. 6개월 정도 사귀고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아버지의 히스테릭한 화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독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까지도 아버지의 등떠밈으로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받은 부모님의 사랑만 유별난 건 아닐 거다. 내 두 동생도 각자의 부모 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으리라. 막내 동생은 어릴 때 이상한 고집이 있어 한 번 울면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그런 동생을 야단치거나 때린 적이 없다. 끝까지 어르곤 하셨다. 그런 엄마였다. 막내가 4살쯤 됐을 때 아버지는 두꺼운 유아 그림책을 사 오셨다. 우리 사회에 유아 책이 나오기 시작했던 거 같다. 자동차, 집 이런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러면 이것을 막내에게 보여 주면서 '자동차' '집' 하고 소리 내면서 보여 주는 것은 내 몫이었다. 어설프게나마 유아용 그림책이 나오기 시작했던 거 같다. 첫째 남동생은 종로 YMCA 수영장에 다녔다 당시로는 가장 좋은 수영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5년 4개월을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말년이 너무 안 좋았다. 움직이지 못하시는데 내가 딸을 낳았다고 아버지께 말을 하니 아버지 몸이 딸 쪽으로 콱 움직였다.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는 아버지셨는데 ~ 아버지가 겨울에 돌아가신 교인의 장지 미아리 쪽 산에 가서 예배를 보다가 쓰러지셨다. 그래서 경희대학교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경희대병원에는 한방 자리뿐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그때까지도 한방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냥 바로 한방 시술을 받았어야 되는데 다른 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하루를 그냥 방치하였다. 골든 타임을 놓친 거다. 천추의 한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인생무상이 맞는 말이다.
추신:지난번에 올린 엄마 이야기 3편과 이번에 아버지 이야기 한편으로 부모 이야기를 정리를 해 봤다. 엄마 아버지 이야기를 어찌 이 짧은 글에
다 담을 수 있으랴마는 미약하게나마 나의 부모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