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들의 사랑

by 지모신

나이 들어 내 인생을 돌아보니 나는 사랑을 참 많이 받은 사람이다. 이 사랑이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받은 사랑에 비해 그만큼 감사함을 표하면서 살아오지 못했다. 늦었지만 한 꼭지씩 그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이야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이모들에게 받은 사랑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내게는 세 분의 이모가 있다. 큰 이모와 셋째 이모는 돌아가셨다. 둘째 이모는 미국에 살고 계신다. 세 이모는 우리 삼 형제를 참 이뻐하였다. 특히 내가 첫째라서 아마도 가장 귀여움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큰 이모는 엄마처럼 살림꾼이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종종 나를 오라고 해서는 밑반찬도 주고 이모 옷도 주고 뜨개질한 옷도 주었다. 나는 아직도 이모가 준 검은 상하 치마 정장을 갖고 있다. 상갓집에 갈 때 종종 입었었다. 한 번은 단추를 채우는 상의 스웨터를 떠 주었다. 팔을 반팔로 떠 주었다. 설거지하고 그럴 때 고무장갑을 끼기 편안하라고 그렇게 뜬 거였다. 그 옷을 떠준 때가 아마 1987년 전후다. 나는 그때 재개발 이전 개포동 주공아파트 1단지에서 살았다. 그 아파트는 11평이었고 방이 두 칸이었다. 큰 방에서는 나와 갓난아기 딸이 잤고 작은 방은 남편 공부방이었다. 그 아파트는 연탄을 땠다. 우리 집은 5층이었는데 연탄재는 부엌에 있는 구멍으로 버리면 1층으로 떨어지게 돼 있었다. 아마도 연탄을 때는 아파트라서 좀 추웠을까? 지금은 겨울에도 집에서 털 스웨터를 입는 일은 없다. 그런데 나는 이모가 떠 준 그 털 스웨터를 그 아파트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잘 입었다.


막내 이모는 나와 나이 차가 여섯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친구 같은 느낌도 있었다. 막내 이모 하면 떠오르는 건 내가 6학년 때 세운 상가 근처 한옥집에서 살 때 와서 나를 데리고 세운상가 분식집에 데려간 거였다. 거기서 가락국수를 사 주었다. 지금은 분식집이나 휴게소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가락국수이지만 나는 그때 그런 가락국수를 처음 먹어 봤다. 세운상가라는 곳이 어린 나와는 상관없는 전파상 전선 등 위주의 가게들만 있는 곳이라고 하고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분식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분식집도 처음 가본 거 같다. 그때 그 가락국수는 내가 먹은 가장 맛있는 가락국수이다.


내가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나서는 막내 이모는 이화여대에서 가까운 신수동 아파트에서 신혼집을 차리고 있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은 이모 집에 가서 이모랑 수다 떨며 노는 게 일이었다. 머리도 간 김에 이모네 동네 미장원에 가서 잘랐다. 이모는 멋쟁이였고 나보다 키가 커서 단이 좀 내게 약간 길지만 통은 맞는 옷들이 있었다. 이모는 옷도 잘 주었다. 단만 줄여서 입으면 됐다. 이모가 불광동으로 이사 가고 나서는 자주 가지를 못했다 몇 번 갔을 뿐이다


몇 해 전 이모가 돌아가셨을 때 코로나 상황이었다. 가족장으로 한다고 문상도 갈 수 없었다. 문상도 못 하면 안 되는데 속상했다.


그래서 내가 다녔던 원불교 강남교당에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으로나마 이모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둘째 이모는 천성이 누군가를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이모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살았던 우리 집 청계천 단칸방에도 종종 놀러 왔다. 조카들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고 갔다. 아마도 이모가 중학교 때쯤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게도 우리 삼 형제를 이뻐했다. 아마 내가 다섯여섯 살 때쯤인 거 같은데 63, 4년 정도인 거 같다. 그때 청계천에 홍수가 났다. 자는데 그날 이모가 놀러 와서 자고 있는데 방으로 물이 들어왔다. 피난을 가야만 했다 정문 쪽은 청계천 대로변으로 이미 홍수 상태여서 거기로 나갈 순 없었고 사랑채 방에서 창문을 넘으면 옆집 장독대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 동네는 을지로로 가는 길로 연결이 돼 있었다. 우리 방은 사랑채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모 엄마 아버지가 우리를 한 명씩 안았다. 방문을 여니 물은 우리 키를 넘었고 어른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물이 찬 마당을 건너 사랑채 방으로 갔다. 거기서 창문으로 우리를 옆집 장독대로 넘겼다. 아마 옆집 사람이 우리를 받아 준 거 같다. 그리고 엄마 아버지 이모가 차례로 창을 넘었다. 그 집은 물이 별로 차지 않았었다. 이모 말로는 길에 물이 다 안 빠져 맨홀에 빠질까 봐 군인 아저씨들이 길 안내를 했다고 한다. 거기서 맨발로 신당동 할머니 집까지 걸어갔다. 그날 이모가 없었으면 엄마 아버지는 우리 셋을 간수하기가 참 힘들었을 거다.


이모는 방학을 하면 방학하던 그날 바로 나와 동생을 데리러 왔다. 그리고 개학 전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모네 동네에도 친구들이 있었다. 방학에만 노는 친구들인데 친했다. 답십리 외가는 산 입구에 있었다. 이모네 집까지는 주택가였고 조그만 올라가면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 산 초입에 천막집도 있었다. 천막집 아이도 우리의 친구였다. 그래서 천막집 안에도 들어가 봤는데 천막집 안에는 살림살이가 다 있고 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가난하게 판잣집 산다고 따돌리고 그런 일 없이 동네 아이들은 다 같이 어울려 놀았다. 이모는 여행사 다니는 이모부와 결혼을 했다. 홀시어머니 아들이었다. 이모가 많이 힘들었다. 애 셋 키우랴, 화투 치러 온 시어머니 동네 아줌마 친구들 뒤치다꺼리 할라 등등으로. 이모부의 해결책은 미국 이민이었다. 시어머니는, 연로해지셔서 한참 나중에, 아마 20년쯤 후 미국에 오셨다. 미국에 오신 시어머니는 이모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는 않으시고 편안히 사시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지금 아픈 나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남편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고 있듯이 이모부도 그렇게 진실되게 사랑하는 좋은 남편이다. 나는 남녀의 불평등 구조, 성폭력 문화 등등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을 주로 연구하는 여성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좋은 남자들이 참 많다. 개인적으로 이런 남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남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질수록 노골적으로 여성혐오를 동력으로 삼는 일베 문화는 힘을 잃고 여남이 상호존중하는 문화가 대세가 될 거라 생각한다.


이모를 자주 못 보고 살았다 이모가 한국 나올 때만 보는 정도였고 내가 미국 갈 일이 한 번 있었고 그때 본 정도였다. 한국에 나올 때마다 내 바바리며 옷을 꼭 챙겨 가지고 오셨다. 그렇게 지내다가 우리 딸과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이모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는 대학에 두 아이를 순차적으로 유학 보냈다. 이 두 아이가 이모에게 받은 사랑이 또 얼마나 컸는지, 이 아이들은 이모와의 사랑 외에도 이모 자식들, 딸과 두 아들의 사랑까지 듬뿍 받았다 이모 딸은 우리 딸을 자기 여동생처럼 챙겨 주었다. 이번에 한국에 나오실 때는 손녀의 신발과 옷을 바리바리 챙겨 오셨다. 나와 우리 아이들까지 대를 이어 이모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미국에서 이모부는 여행사를 하였다. 이모도 같이 거들었다. 그런데 한국인 대상 여행 상품을 운영하던 이모부 회사는 IMF 때 문을 닫을 뿐이 없었다. 이때 이 난국을 이모가 버클리대 앞에서 샌드위치와 만둣국을 하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극복했다. 이모와 이모 가족의 영웅담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따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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