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빛나는 한국여성
지난번 글에서는 세 이모들이 조카인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었는가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둘째 이모는 결혼해서 홀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참 많이 힘들었고 이모부는 그 해결책으로 미국 이민을 선택했다고 말을 했다. 오늘 말할 이야기는 이민 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국이 IMF 구제금융 받던 시기를 이모를 중심으로 잘 이겨낸 이야기이다. 이모는 현재 일흔여덟이니 이모 50대 때 이야기다. 한국 엄마들은 대체로 자식에 대한 지극 정성에서는 애순이고 애순이 엄마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폭싹 속았수다'를 시청헀다. 엄마, 이모, 그리고 두 애를 키워 시집 장가보낸 나까지 애순이와 오버랩된다. 이제 이모 가족의 위기의 시간이면서 이모가 빛나던 시기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이모부는 한국에서 여행사를 다녔다. 세방 여행사였고 거기서 가장 젊은 나이로 전무까지 빠른 승진을 했다. 이모부는 지인이 미국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는데 넘기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받고 미국을 먼저 가서 그 사업성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이민을 결정하였다. 홀시어머니가 유별난다고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쳐 이모가 너무 힘들게 살고 있었다. 이모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도 이민을 결정한 중요한 이유였다. 한국인만을 주로 상대로 하는 여행사였어도 제법 잘 됐다. 직원을 6~7명을 두었고 버스도 세 대나 굴렸다. 이때는
서울에서 언니네 조카들 등 친척이 다 왔다.
그때는 이모부가 여유가 있으니까 관광 다 시켜주고 이모 집에 와서 보름, 한 달씩 있다 갔다. 그러다가 IMF 사태 폭탄을, 직통으로 맞았다. 한국 여행사들은 결제가 늦은 편이었다. 한국 여행사들에게서는 바로 결제받지 못하고 밀린 상태로 미국의 경비는 그때그때 바로바로 지출하였다. 사업이 잘 될 때는 이런 방식으로 굴러가도 괜찮았는데 한국에서 IMF 사태가 터지자 밀린 대금들을 한국 여행사들로부터 받지 못하게 됐다. 사업이 잘 돼 이모까지 사무실에 나와 일을 열심히 배우고 있을 때였다. 이모부는 집을 팔고 결국 여행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봉고차를 한대 남겨 두고 한국인 여행객을 공항에서 태워주거나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일도 해봤지만 이건 수입이 안 됐다. 큰딸과 두 아들이 모두 대학을 다닐 때였다. 딸은 집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두 아들은 한 애는 LA 또 한 애는 텍사스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대학 옆에서 살아야 하니 각각 아파트 비용 생활비가 필요했다. 뭔가 다른 돈벌이 수단이 필요했다.
이모는 이모라도 뭐 할 게 없나 찾게 되었다, 지역 신문에서 버클리 대학 앞에 건물주에게 주는 보증금과 월세는 별도고 거기서 장사하던 분에게 줘야 하는 권리금이 3만 불에 나온 가게를 발견했다. 옛날 건물이었다. 그 정도는 아주 싼 비용이었다. 그 가게를 빌렸다. 그때가 2000년도였다.
가스레인지 이런 거 하나도 없는 조그만 주방에 손님 테이블이 안에 6개 바깥에 2개였다. 가게 모양은 괜찮았다. 딸에게 서빙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딸과 나중에 사위가 된 딸의 남자 친구가 서빙을 도와줬다.
처음에는 점심 위주로 2시까지 운영하다 나중에는 잘 돼 5시까지 운영했다. 메뉴는 만둣국과 캘리포니아 롤, 이모가 양념한 고추장을 발라 구운 닭가슴살 샌드위치, 튜나 샌드위치 등의 다양한 샌드위치, 데리야끼 치킨, 블루베리 같은 과일을 갈아 주는 스무디 정도였다. 매운 닭 샌드위치와 캘리포니아 롤 등 샌드위치는 각각 하루 15~16개 정도 팔렸다. 수업이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롤을 사러 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 남학생에게는 남은 샌드위치 끝 부분들을 덤으로 주면 좋아하며 그것도 다 먹었다. 만두국은 늘 한인 슈퍼에서 사다 먹던 한국 만두로 했고 했고 만두국 국물은 집에서 만들어 갔다. 거기에 양배추 고명을 얹어 주었다. 제일 인기가 많았던 게 고추장 양념으로 한 매운 닭 샌드위치였다. 고추장 양념해 구운 닭가슴살을 빵에 넣어 만든 샌드위치였다. 이것도 집에서 양념하고 구워서 가지고 나갔고 가게에서는 레인지에 살짝 데워만 줬다. 커피는 뽑아서 놔두면 자기네가 따라먹게 했다. 스무디도 잘 나갔다. 아끼지 않고 음식을 많이 주니까 점심 때는 사람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섰다. 샌드위치를 포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맛있는 조그만 사과 하나를 서비스로 넣어 주었다. 이것도 식당이 인기 있게 된 비결인 거 같다.
단골손님이 생겼다. 버클리대에서 일하는 한 직원 아주머니는 주 5일을 매일 '매운 닭 샌드위치만 먹었다. 이 샌드위치 맛에 중독된 듯했다. 그러다 너무 이 샌드위치만 먹는다 싶었는지 어쩌다 한 번씩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노 교수 한 분은 매일 만두국만 먹고 갔다. 한 사람이 맛있는 집이라며 몇 명씩 데려오기도 했다.
데리야끼 치킨에 옆에 밥 놓고 야채 썰어 샐러드 넣고 그렇게 해서 주면 그것도 사람들이 좋아했다. 만두국은 버클리 대 앞 식당 중에서 제일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줄을 섰을 정도였다. 교수들도 많이 와서 먹었다. 이걸로 필요한 생활비가 다 해결됐다.
딸과 딸 남자 친구가 자기들 공부가 있고 취업준비도 해야 해서 더 도와주기 힘들어서 2003년에 가게를 접을 수뿐이 없었다. 아들들도 대학을 졸업했다. 집에서 음식을 거의 준비해 가랴 새벽에 가게 나가랴 꽤 힘은 들었지만 그 사이에 두 아들 학비랑 월세랑 다 해결할 정도로 잘 벌었다. 힘은 들어도 가게를 접으려니 아쉬웠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하고 싶었다. 그러면 돈도 꽤 많이 벌았을 것 같다.
이모 세대들은 식당, 샌드위치 숍, 밸리샵, 세탁소 이런 걸 많이 했다. 이 세대들은 영어를 잘 못해 애들이 부모님 일들을 많이 도와주면서 가게에서 컸다. 그래서 2세대들은 부모님 일을 절대 안 하려고 했다. 그래서 1세대들은 그 사업들을 거의 다 팔고 2세대들은 딴 거를 한다. 이모 딸은 직원을 열아홉 명이나 거느리며 헤어샆을 두 개나 운영한다. 중소기업 사장님인 셈이다. 아들 둘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동네 차를 손봐주더니 둘 다 자동차 엔지니어다. 이제 이모는 여한이 없다. 외할머니가 브라질 이민 사기를 당해 잘 다니던 계성중학교를 그만두고 좋지 않은 고등학교를 간 게 회한이긴 하였다. 이모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계성 여중은 이모와 또 한 명, 둘 밖에 못 갔다. 평균 90점이 넘어야지 계성여중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민 바람이 없었으면 계속 공부를 해서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생각도 해 봤지만 이제는 다 내려놨다 자식들이 잘 살고 있으니 잘 산 인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