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에 마음 쏟기
20대 후반, 어렵지 않게 고시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평소 나에 대해 거시적 관점에서의 객관화가 생활이었던 덕분이다. 그건 내 기억이 닿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의 버릇이었다. 그 점에 정말 감사한다.
또한 복에 넘치게도, 고시생활은 길지 않았다. 평균 3년이라는 이 수험바닥에서 나는 2년이 채 되지 않은 채로 완주를 했다. 역시나 자기 객관화의 눈부신 산물 덕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계획을 짜서 강력한 믿음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자신에 대한 인지는 정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별거 아닌 것처럼 서술한 것과 달리, 실은 대단히 많은 위기와 깊은 우울감을 경험했다. 이번 회차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다시 1차 시험의 쳇바퀴 속으로 뛰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합격발표날까지의 3개월 동안 한 번도 책을 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분명 난 깊숙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러한 감정의 공허 속에서 허우적대는 와중에도 난 그저 존재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합격자 동기들을 만나 보니 각자의 고된 수험생활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꽤 보였다. 아직 수험생 신분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고.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자신을 대견해하면서도, 그때의 삶에 대해서 트라우마처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고 느꼈다. 물론 그들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겠으나, 그 시기를 자신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지워내려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그때의 시기를 그저 흘러가는 한 움큼의 강물처럼 의미 없이 흩어지게 두고 싶지 않다.
나는 수험기간에도 명확히 존재하는 자이고 싶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나의 삶을 사는 유일한 존재로서 눈부시게 빛을 내고 싶었다. 이 시기는 내가 선택한 삶이고, 오직 나만이 살아낼 수 있는 인생의 한 조각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이고 되뇌었다. 나의 인생이다. 나는 밝게 빛나는 중이다. 엄마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 적막한 일상의 굴레에서도 나는 요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나라는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므로.
그 덕택에 담배를 태우며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더 즐겁게 관찰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었고, 훌륭한 회복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 한 순간의 실수 내지 나약함은 단순히 수험생활 하루를 망친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의 일부분이 일그러진 것이기 때문에. 단단한 마음으로 수정과 개선을 거듭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고시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는 짧은 기간에 대한 이야기도, 합격이라는 결과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순간순간을 뚜렷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이 빚어낸, 삶의 한 페이지에 대한 선명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 선명한 기억을 원동력으로 나는 다음 페이지도 더 잘 그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 나라는 배역을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면. 내 삶을 사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저의 생각과 언행이 당신에게도 가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