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에게 바라는 욕의 세계
초등학생 서너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됐다. 주말 야구를 하고 온 친구 무리인 듯한데, 말 끝마다 욕을 섞어 쓴다. “그러니까, 조금 일찍 만나자고 했잖아. 씨벌”, “야 십x탱아, 내가 그걸 알았냐” 이하 기타 등등. 욕의 사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나는 “어머, 욕은 절대 안 돼!”라고 비판하는 고상한 존재는 아니다. 고3 시절, 숨도 못 쉴 것 같은 스케줄을 “이런 C”라는 추임새 한 방으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사람으로서, 오히려 간헐적 배설을 실현하고 있다. 혼자서든, 무리와 함께든.
하지만, 욕의 ‘과하거나, 맥락 없는 사용’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비단 어떤 초등학생들의 대화에서만이 아니다. 온라인 댓글에서 보이는 무분별한 폭력성, 일부 한국 영화의 작심하고 배치한 듯한 욕 대사들을 듣다 보면, ‘저것의 줄거리가 대체 무엇인고?’를 반문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지랄’이 90%를 차지하는 의사소통에서 왜 권태감을 느끼게 될까. ‘나가 뒈져라’등의 극단적 욕의 경지에서 왜 짜증이 솟구칠까 등. 한마디로 “왜, 우리에겐 제대로 된 욕이 없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글의 시작이다. 화자는 나, 청자는 나의 분신인 미취학 아동 두 아이들.
“얘들아, 욕의 대상과 이유를 명확히 해라” 민속학 전공의 고 김열규 교수에 따르면 욕은 인간의 악덕에 대한 공격이요, 야유요, 조롱이라고 한다. 이것은 탈춤에 등장하는 말뚝이나 취바리가 못된 양반을 향해 차진 욕을 퍼붓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럽고 치사한 세상을 향해 인간적 윤리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 그러니 욕을 하려거든 부디 너희들보다 센 놈, 나쁜 놈을 골라라. 학교에서 약한 자 괴롭히는 놈, 직장에서 정치를 일삼으며 "일 잘하는 놈들은 찌그러져 있으라" 불이익 주는 놈들에게 적극적으로 써 먹어라. 그만큼 욕의 시작은 불의한 일에 대한 스토리텔링, 맥락이다.
"욕의 분류에 대해 생각해라" 감탄사형이 있는가 하면 컨텐츠형이 있단다. 이 중 추천하는 건 감탄사형 욕이다. 너무 기가 차서 그 분노를 급박히 날리고 싶을 때 감탄사를 활용해라.'제기랄...', '허...니미'등 말이다. 콘텐츠형은 주의를 요한다. 한국 사람들은 ‘병신, 바보, 패륜’에 관한 욕을 많이 사용한다는데, 병신 욕과 바보 욕은 인신공격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욕의 긍정적 구실을 살릴 주제는 역시 패륜이다. 친한 친구에게 괜히 '십새끼'를 외치지 말고, 그 에너지를 아껴 인성을 포기한 자들에게 시원히 분노를 던져라. 사람다움을 자각시키는 것이 욕의 진짜 역할이다.
"욕의 내성을 키워라" <우리는 왜 위험한 것에 끌리는가>의 저자, 리처드 스티븐슨씨가 '욕과 내성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단다. 욕설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경감하는 효과가 있다고. 나아가 그는 ‘얼음물 실험’을 통해 재미있는 결론을 발견한다.욕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을 때 얼음물의 고통을 더 오래 견뎌냈지만, 평소 욕 사용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통증 완화 효과는 크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꼭 필요한 순간에 욕의 효과가 발휘되도록, 욕을 지나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이 실험의 조언이다.매일 욕을 달고 사는 부장님께 어떤 감흥도 못 느끼는 내 조언이기도 하다.
"어휘력을 키워라" '씨벌'을 반복하는 게 욕의 전부가 아니다. 비합리적인 상식에 대처하는 것은 '상식은 물에 말아먹은 놈','뇌의 0.1mm도 상식은 채우지 않은 놈'등의 다양한 단어 활용이 있다.'역설,비유,과장법' 등도 욕의 수준을 키워줄 것이다. 웃기지도 않은, 하지만 너무 심각해질 상황에선 "아주 굿이에요, 굿!"이라는 역설적 칭찬을 던지거나 <쇼미더머니>나 <고등래퍼>를 참조해 은유적 랩에 가까운 욕을 퍼부어라.엄밀히 말해 랩이 욕은 아니지만,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일갈이란 점에선 근본은 유사하다. 거짓을 일삼는 자에게 "코가 길어져 우주까지 닿겠어"로 과장되게 비아냥거림도 방법이다.활용은 너희들의 몫이다.
물론 너희들이 욕을 하는 것은 크게 반가운 일은 아니다.하지만 만약 욕을 된다면 그 누구보다 ‘제대로 된 욕’을 하였으면 좋겠다.몇 가지 단어로 때우지 말고. 매 순간 일상처럼 반복하지 말고. 자신의 일이든, 타인의 일이든, 사회에 관한 일이든 “아, 한 방 제대로 먹여야겠다”는 작심을 제대로 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가네시로 가즈키의 <GO>에 나오는 대사. "권투가 뭐냐? 원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밖의 것을 쟁취하는 행위야!"
주먹처럼 뻗는 '너희들의 욕'이 시시하지 않도록, 부디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