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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주 Mar 19. 2018

도대체 연애는 왜

02. 지나친 겸손의 비극

                                

                                                       겸양지덕


                                     괜히 천사인 척 했다가 나만 헌신짝되는 화법

                                   일순간 화가 폭발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



     

                            여보, 아침밥 챙겨줘서 고마워...    뭘요, 제가 늘 부족한걸요.



                                                    

          

                                              그래, 당신이 좀 부족하긴 하지.


                          뭐라고, 이놈아!



                               02.  

             "지나친 겸손의 비극" 


대다수의 엄마 세대들이 그랬고 우리 세대의 곰녀들이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지나친 겸양의 미덕으로 스스로를 필요 이상 낮춘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우리 엄마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말을 살펴보자. 정말 해줄 것 다해주고 희생할 것 다 하면서도 늘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다.


“엄마가 못해줘서 미안해” 혹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자식에게 더 퍼주지 못하는 인지상정은 일견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런 겸양의 인사도 반복되다 보면 실제 상대에게 이렇게 부족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한다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난 이런 사례들을 통칭해 ‘지나친 겸손의 비극’이라 부르고 싶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처럼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흔들었더니 나중엔 종만 흔들어도 침을 흘렸다는 훈련과 인지의 상관관계 실험) 반복된 말의 겸손이 상대로 하여금 나를 진심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인지하게 만든다는 것.  


                                 /    


주노라’는 전형적인 곰녀이자 내 직장선배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그녀와 동질감을 갖고 이야기하다 보면 스스로의 노력을 비하하는 듯한 대목들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이번에 첫째가 유치원에서 소풍을 가는데, 별 것 아니지만 좀 만들어봤어”하며 사진으로 그녀가 만든 도시락을 보여준다. 코끼리, 토끼, 강아지 모양의 주먹밥이 여간 귀엽지 않다. “우와, 이거 다 선배가 만든 거에요?”하고 칭찬을 하면 갑자기 한숨을 푹 쉰다.

“다른 엄마들에 비해 뭐 별거 아니지. 내 요리솜씨 정말 별로야”     


또 한번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관리 잘 한 30대 엄마들이 웬만한 20대보다 낫던데, 나는 피부며 몸매며 이제 자신이 없어”, “선배, 일주일에 두 번은 운동 꾸준히 하지 않아요? 몸매 좋잖아요. 피부도 나처럼 좁쌀 여드름 같은 거 없어 깨끗하고” 그러면 선배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자신을 괴롭히는 말을 내뱉는다.

“무슨 소리야, 난 진짜 부족해. 부족하다고!”  


                                /  


하지만, 이런 징징거림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A.지나칠 정도의 자기비하  B.상대의 위로와 칭찬  C. (말은 하지 않지만) 스스로에 대한 뿌듯한 안심. 한마디로 100프로 속내가 아닌 말을 던지고 그 말들 속에 ‘부족함’을 가장한 ‘자신의 장점’을 던짐으로써 상대에게 자신의 노력을 재차 확인 받고,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하는 삼단구조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     


하지만 이런 삼단구조는 어디까지나 그 행간의 속뜻을 캐치해줄 수 있는 섬세한 여자, 혹은 그런 여자의 감성을 상당히 많이 소유한 남자들하고만 공유할 수 있다. 보통의 남자는 말하고자 하는 진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표면적 단어해석에 머물러 어리석게도 사태를 더 키워버리니까.     


 그날은 선배가 씩씩대며 들어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배의 남편이 추석 때 그녀가 평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누가“너네 식구 요즘 어떻게 사니?”정도로 안부를 물은 것 같은데, 그녀의 남편은 정말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평소 노라 선배가 스스로를 비하하며 반복했던 말을 정말 기계적으로 전한 것이다.     

그녀의 요리솜씨가 얼마나 부족하며, 애들에게도 얼마나 헌신하지 못하는지. 게다가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버느라고 얼마나 부족한 아내이자 엄마가 되고 있는지 등의, 선배가 평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이야기들을 그대로 술술 말해버린 거다. (이래서, 주입식 교육의 힘은 무섭다)     


그러니 그것을 나중에 들은 당사자의 기분은 어땠을까. “이런 C, 사람을 뭘로 보고.......”하며 그토록 고상했던 선배의 얼굴이 욕설과 함께 구겨지는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는 한편으로는 그 울컥함이 이해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선배, 이제는 좀 본인에게 솔직해지면 안 될까요?’  


                                 /

  

이걸 브랜드 언어로 옮기면 이거다. 내 성격이 내 평판을 만든다는 것. 모 철학자의 말을 빌자면 ‘순간의 합이 나를 만드는 것’일과 같다. 그만큼 나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내가 어필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동화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가 자신이 좋아했던 왕자와 결혼하지 못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기껏 왕자를 구해주고도 “내가 구해줬어요”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못해서다. (그녀가 두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잃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리고 정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본인이 왕자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공주에게 왕자를 빼앗겨 결국 물거품이 된다. “나는 왕자님이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요”라는 참으로 신파적인 멘트를 남기면서.     

결국 가족이란 것도 내가 어떻게 포지셔닝 할 지를 스스로 연출하는 사회적 집단이다. 그러니 그 집단의 핵심멤버이자 CEO의 자세로 우리의 존재감은 스스로 각인시키자. 엄마로서 아내로서 현재 어떤 생각, 어떤 노력, 어떤 성과를 이어가고 있는지를 가A to Z까지 세세히 각인시키라.


그렇게 ‘다소 오버다’ 싶을 정도의 반복된 훈련이 당신의 입지를 만든다. 할 것 다 하고도 내세우지 못해 손해 보는 나, 아니 우리 같은 곰녀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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