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육아의 정당한 보상에 대해 묻다
할마. 할빠. 누군가에게 최근 알게 된 신조어일 뿐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육아정책연구소가 발표한 ‘맞벌이 가구의 가정 내 보육 보고서’에 따르면 조부모 육아참여율은 2012년 50%에서 2016년 63.8%로 무려 13.8%p나 증가했다고 한다. 비단 문서 상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햇살 좋은 날, 손주를 업고 나온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놀이터에서 할머니와 옥신각신 하고 있는 아이들의 투샷은 우리가 주변에서 목격하는 황혼육아의 명확한 증거니까. 그리고 그런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나 역시도 마음이 자못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바로 내가 그 ‘다른 누군가’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결혼하자마자 아기가 생겼다. 이건 축복이기도 했지만 걱정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사기업의 특성상 1년 이상 육아휴직을 낸다는 건 퇴사를 말하는 것과 같아서였다. 그래서였을까. 만만한 게 친정이라고, “딱 100일만 도와주세요”라고 들어간 부모님 집에 어느 순간 딸아이를 아예 맡겨버리고 말았다.
시댁은 지방에 있어 심리적 거리가 있었고, 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였으니까. 특히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조선족 분들과 수십 차례 면접을 진행하다 보면 내 속이 터지기도 했지만, “살림은 알아서 하세요. 난 이 돈으론 애만 봅니다”라고 선을 긋는 그들에게서 내 아이를 맡기고 싶은 따뜻한 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결국 안정성, 온정성 측면에서 최상인 친정은 내 마지막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곧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일단 남편이 그 시작이었다. 주중에는 아이를 친정에 맡겼기 때문에 주말에만 아이를 데려왔던 우리 부부. 몸도 마음도 편했던 나와 달리 남편은 “딸이 보고 싶다”, “왜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주말마다 짬짜미 부딪히는 친정 부모와의 갈등도 한몫 했다. “김서방, 아리는 아침에 꼭 사과를 갈아 먹여야 해”, “요즘 M사 교재가 그렇게 좋다는데, 한번 시켜보지?”등의 육아에 관한 반복된 조언들은 남편에겐 어느 순간 잔소리로 느껴졌으니까.
친정의 입장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이 수발에, 어느 순간 뒷전이 된 살림으로 본인들 식사 챙겨먹을 시간도 없었다. 언젠가 월차를 내고 친정에 방문해보니 집은 여기저기 던져진 장난감, 책 등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얼굴은 채 씻었을까 말까 한 엄마 아빠가 딸아이를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이느라 난리였다. 마치 군대가 휩쓸고 간 전쟁 한복판에서 평화로운 건 내 아이 한 명뿐이었다. 소고기 무국에 계란찜, 각종 나물과 생선반찬 식탁을 마주하고.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의 진짜 부모는 누구일까. 생리적으로 그 아이를 낳은 나와 남편일까. 아니면 아이를 키워주고 있는 친정 부모일까. 하지만 우리가 부모의 권리를 주장하기엔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았고, 간혹 아이의 얼굴에 스크래치라도 나면 돌아서서 은근히 친정부모 탓을 하기 바빴다. 딸이 그 누구보다 삼시세끼 밥 잘 먹고, 즐겁게 놀길 바랬지만 그 역시도 나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부모의 손에 의지했을 뿐이다. 때로는 아이의 상태 혹은 육아상식을 전해주는 부모에게, ‘얘기가 길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한편으론 고마우면서도 내 부모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다는 불만이었다.
그렇다고 친정부모가 완벽한 부모도 아니었다. 아이에겐 누구보다 정성을 다 했지만, 아이는 커 가면서 엄마 혹은 아빠를 종종 찾았다. 더하여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면, 친정부모는 아이 씻기기, 집안 치우기에, 나와 남편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마치 ‘이런 환경에서 잘 지내고 있어’를 안심시키기 라도 하듯, 혹시나 딸 자식 떼어놓고 신경 쓰일 우리 부부를 위해 평소보다 긴장을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그 누구도 ‘내가 진짜 부모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늘 미묘한 긴장이 흘렀고, 서로가 하고 싶은 불만을 침묵으로 삼켰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내가 유일하게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 노력의 보상을 월급 형태의 용돈으로 챙겨드렸던 일뿐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읊조림과 함께.
이후, 딸아이는 세 살 무렵 직장 어린이집에 들어가며 우리와 살게 되었다. 아이와 이별할 때도 친정부모는 별 말이 없었다. 단지 옷, 장난감, 반찬 등을 싸 주며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자주 놀러 갈게”라고 했을 뿐이다. 나는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그들을 백미러 너머로 지켜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한 두 달이 지났을까. 주말에 무심코 돌린 TV 프로그램에서 한 할아버지의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몇 년 간 손주를 키우고 떠나 보낸, 한 홀아버지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가득 차서 담담히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손주가 떠나던 날, 마음이 너무도 허전해서 화장실에 손이라도 씻을까 하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냥 주저 앉아 한 시간 정도를 통곡을 했다고 한다. 가끔은 손주의 이름을 부르고, 가끔은 매정히 아이를 데리고 간 딸을 욕 하면서. 손주가 채워버렸던 시간표를 이제 지킬 필요가 없는 할아버지. “이제 무얼 하죠?”하고 제작진에게 되묻는 그의 모습에 그만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어쩌다가 틀게 된 화면이었을 뿐이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나간 사이, 이제야 좀 편해졌다며 마루를 뒹굴다가 보게 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여파는 너무 컸다. 어느 새 똑바로 앉아 TV를 응시하던 나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뭔가 애써 밀어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세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나에 대한 합리화로, 남편에 대한 어설픈 눈치로, 애써 외면했던 내 부모에 대한 진심을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단돈 몇 푼을 쥐어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노력을 보상해줄 수 없음을. 그들이 잃어버린 시간과 건강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아이와 나를 위해 우주처럼 온 정성을 쏟았던 그 마음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할마할빠의 노동의 대가. 빠져나간 통장의 액수만큼 그 보상을 채워 넣으려 했던 내 부끄러운 과거는 아직 다 청산되지 못했다. 친정은 여전히 내가 바쁠 때마다 내 빈자리를 말없이 채워주는 분들이며, 멘붕의 육아에 부닥칠 때마다 내가 찾는 제1의 사람들이다. 애들 키우느라 바쁠 텐데 맛있는 밥이라도 사먹으라며,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사주라며, 내 손에 꼬깃한 돈을 쥐어주고 가는 친정 부모에게 나는 그때 그 시간의 이야기를 화해하듯 웃으며 꺼낼 자신이 도저히 없다. 오히려 텅 비어버린 듯한 이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예의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