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예술판 생존의 기술
직업의 종류에 따라 성비 쏠림 현상이 있는 분야가 있다. 문화 예술 쪽도 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극명한 여초(女超)다. 특히, 이 일을 시작했던 나의 초년생 시절은 심하면 한 조직에 90% 이상이 여성이었었다.
왜 그럴까?!
첫째,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여성의 관심과 참여 의지가 남성보다 현저히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모 조사에 따르면, 20대 남녀의 직업 선호도 결과에서도 문화 예술 관련 직업을 희망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또한, 문화생활 참여율도 남성보다 여성이 높고 적극적이다.
둘째, 시작은 했으나 이 바닥을 일찍이 떠나는 남성들의 비율이 적지 않다. 물론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평균 연봉이 너무 적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자신의 직업적 소명이 낮은 연봉 조건보다 더 크다고 믿는 소수의 용기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다수의 남성에게 이 분야는 경제적 생존 전략으로서 합리적인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여전히 '남성은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유교적 관념이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탓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 여성의 경우, 문화 예술 분야의 낮은 연봉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결혼 전에 가질 만한 품위 있는 직업'으로 여기거나, 월급이 없어도 '취미형 직업인'으로 만족하겠다는 이들도 만나보았다. 집안의 든든한 후원이 있거나 굳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 필요 없는 이들에게는, 문화 예술 일이 그저 '한때의 직업 체험'에 머무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남녀가 동등한 문화 속에서 직업을 선택하고, 같은 목적과 조건으로 만나 일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각자의 환경적 격차가 매우 크다.
나는 어땠을까? 우리 집안에는 예술을 직업으로 가진 이도 없었고, 든든한 후원자 덕분에 '취미형 직업인'을 꿈꿀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풋내기 신입이었다. 그러나 문화 예술이 주는 매력이 너무나 커서 시작한, 그야말로 '열정만 100점'짜리 시절이었다.
이 일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시작하고 싶지만, 이런저런 조건 때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후배들을 여럿 만났다. 나는 그때마다 "그럴 수 있지"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네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시작해'라고 되뇌었다. 나도 여전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바닥에서 20년을 훌쩍 넘긴 선배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이제 20년 차 기획자가 된 나는 내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다. 이 정도의 마음이라면, 제법 잘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20대 중반에 이 일을 시작하여 30대 중반, 약 10년 차가 되었을 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했다. 그토록 능력 있던 여성 선배들 중 절반, 아니 어쩌면 3분의 2 이상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대부분은 '결혼 후 출산과 육아'라는 거대한 전환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 자체가 이 일에 큰 허들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친구 같은 배우자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더없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육아'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시작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신념과 생각, 그리고 일상이 모두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가족 중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가뜩이나 헐떡이며 해내야 하는 육아를 매 순간 숨이 끝까지 차오르도록 감당해야 한다. 결국 자신이 숨차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그런 엄마로 기억되고 싶지 않기에, 아이를 위해 비장하게 멈춘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이다.
내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선배들의 그런 '허덕이는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렇게 잠시의 시간도 내지 못하고 허둥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세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지금의 나는 비로소 그때의 선배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그녀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그렇게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수많은 여성 능력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바닥에서 빠져나간다. 지금의 나는 이 분야에서 활약하는 '멋진 여자 선배'를 만나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어렵게 만난 선배가 있을 때면, 나는 마치 풋내기 신입처럼 그녀를 마구 응원한다. 제발 내 앞에서 멋진 선배로 계속 길을 이끌어 달라고 말이다. 문득 오늘은 나의 첫 사수에게 연락해 봐야겠다. 이젠 아이 둘의 다정한 엄마가 된 그녀. 일할 때, 내겐 아이돌보다 더 빛나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다.
[글/그림 신나]
Prolog: 문화 기획자가 뭔데? (feat. 어느 날 찾아온 후배 놈...)
Part 1. 진짜 이 일 하고 싶니?
왜 하필 문화 기획자? 딴 거 할 거 많잖아
예술, 정답이 없는 특별한 곳
Part 2. 예술판 생존의 기술
화려함 뒤에 감춰진 현실의 민낯
다름을 이해하는 시선: 장르와 공간 1
다름을 이해하는 시선: 장르와 공간 2
혼자가 아닌 우리: 협업의 가치
여성 기획자로 살아온다는 것
문화 기획자의 파워루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
Part 3. 예술가와 조직 사이, 멘털 지키는 법
예술가와 대화는 통역이 필요해
예술가한텐 친구, 조직한텐 충신? 소통은 너무 어렵다
꼰대 되기 싫으면 눈치 챙기고, 요즘 트렌드 읽기
관객이 주인공이야
선배? 후배? 결국 '한 배' 탄 동지들
Epilogue: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