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중학교 동창인 친구와 퇴근 후 저녁을 먹기로 했다.
금요일이라서 여의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여유롭고, 발걸음은 조금 더 가볍다.
금요일 아침에 출근할 때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피곤이 얼굴에 많이 보이니 주의하세요.' 라는 검사 결과도 나를 게이치 않게 만드는,
강력한 주말의 힘.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며 함께 성장해온 사람이 주는 친근함이 있다.
조금 더 어른스럽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내 있는 그대로, 어린 모습 그대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봐줄 거란 확신.
그리고 그 확신에서 오는 안도.
친구를 만난다고, 화장도 하고 여의도 직장인처럼 차려입고 오늘 집을 나섰다.
내 친구는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방긋 웃으며, 며칠 전 만난 사람처럼 같이 걷기 시작한다.
만나자마자 다이소로 가잔다. 살 게 있다고.
자연스럽게 다이소에 가서 친구는 살걸 사고, 우리는 써보고 괜찮았던 화장품들을 서로에게 추천하다
내가 '지금 이게 10년 전 핫플랙스와 교보문고에서 문구를 사던 우리랑 도대체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친구는 대답한다.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우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왠지 찡한 마음이 들어 다문 입술에 조금 힘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소중한 사람을 데려가도 자신 있을 만큼 괜찮은 맛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성공적이다.
친구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걸 보니 짜릿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이 친구도 좋아하는구나,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저런 각자 사는 얘기를 하다 맥주를 한 병 시킨다.
내가 나서서 술을 시키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먹고 있는 따뜻한 음식 때문인지, 시원한 맥주가 땡겼다.
최근 먹었던 맥주 중 가장 시원하고, 가장 맛있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짠짠 잔을 부딪치며 '너무 맛있다'를 연발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술렁술렁 목구멍 밑으로 넘긴다.
몸이 아주 그냥 벌써부터 쫙쫙 영양분을 흡수하는 느낌이다.
일하시던 식당의 아주머니가 닫혀있던 사이드 문을 잠깐 연다.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동시에 얘기한다. '와 저 바람 너무 시원하다.'
그러곤 '엇! 나도 그생각 했어!' 라며 킬킬대며 또 잔을 부딪친다.
따뜻한 공간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
그리고 얼음장 처럼 차가운 맥주까지.
이 완벽한 조합에 어질어질하다고 느낀다.
배가 너무 많이 튀어 나와서 그런 배를 서로 만져보고 웃으며 한강으로 향한다. 좀 걷자며.
걷는 걸 좋아하는 친구와 내가 자주 가는 공간들을 다시금 함께 누빈다.
느낌이 다르다. 다르게 좋다.
달빛에 비치는 한강을 보며 '좋다.' 한마디 하고,
눈은 그 반짝임에 고정 시켜 둔 채 또 두런두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눈다.
그렇게 걸어다니니 생각보다 추워졌다.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다닐까?' 하고 물으니
'나 구경하는거 좋아하잖아!'라며 신나서 대답하는 친구는 중학생때 그 모습과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가는 길에 낙엽이 후두둑 떨어진다.
영화같이, 정말 한꺼번에 많이도 떨어진다.
'우리 한번 잡아보자.' 라며 둘 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걷는다.
함께 하는 그 행동에 맞춰 중학생 같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함께라서 그 웃음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미소도 끊이질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단 하나의 낙엽도 잡지 못하고 그 거리를 지나친다.
'이 순간이 이번 가을 내 피날레야' 하고 친구한테 말한다.
친구는 '너무 좋은 말이다.' 라며 대답해준다.
쇼핑몰에 들어가선 나에게 이런 저런 옷을 입혀보곤
잘 맞는 사이즈와 잘 어울리는 색을 유심히 알려준다.
나는 쇼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즐거웠다.
뭔가 챙김 받는 기분이랄까.
그 친구 앞에선 새 옷을 입고 말간하게 서있는 내 모습이 괜히 사랑스럽다.
또 다른 곳에서는 향을 가득 맡다가,
마지막으로 간 올리브영에서는 둘다 어마어마하게 촉촉해진 손과
미스트로 흥건해진 얼굴을 하고 걸어 나온다.
친구의 집이 멀어 10시 쯤 헤어졌는데,
4시간이 무슨 40분 처럼 지나갔다며 아쉽다고 다음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어릴 적 친구가 한 달간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근무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의도가 1.5도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음주에도 환한 얼굴로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내야지, 생각하며 가방을 정리하는데,
웬걸. 열려 있던 가방 앞 주머니에 어여쁜 낙엽이.
누가 고이 넣어둔 것처럼 고운 자태로 발견된다.
하. 두 손으로 잡으려 할 땐 잡히지 않았던 그 낙엽이.
잡으려던 그 모든 순간, 계속해서 내 등 뒤에 있었던.
낙엽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 많은 것들이, 내가 알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는 걸.
친구는 낙엽이 흩날리는 걸 보고 말했다.
'낭만이다. 여기서 낙엽을 잡으면 진짜 낭만이겠다.' 라고.
집에와서 낙엽을 보고 혼잣말한다.
오늘 저녁, 친구와 함께한 시간은 '낭만' 그 자체였다고.
고마운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오늘 밤, 낭만이 내 곁을 스쳐가고, 가을밤은 또 이렇게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