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하루의 시작
어린 시절 우리 집 냉장고 물 병은 늘 보리차로 채워져 있었다.
정수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 엄마는 늘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인 뒤, 다 마신 주스 유리병에 보리차를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보리차를 한 컵 따라 마실 때 늘 의아했다. 왜 우리 집엔 맹물이 없을까. 밥 먹고 시원한 맹물로 입가심이 하고 싶었는데, 보리차 특유의 구수한 맛이 금세 입안의 음식 맛을 쓸어가 버리는 게 아쉬웠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 집 주방에도 정수기가 생겼고, 냉장고 속 보리차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태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며 생긴 준비물 중 하나는 빨대컵이다. 돌 전 아기는 끓인 후 식힌 물을 먹여야 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봐서, 첫날엔 휴대용 분유포트까지 어린이집에 보냈다. 어린이집에서도 태이에게 데운 물을 주길 바라며. (유난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분유 포트는 필요 없다며, 어린이집에 정수기가 있으니 컵만 보내라고 하셨다.
아직 정수기 물은 먹이고 싶지 않아, 그때부터 아침마다 보리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쿠팡에서 굳이 '유기농' 보리차를 검색해 국산 보리를 주문했다. 그리고 매일 물 1.5 리터에 볶은 보리 한 줌을 넣어 10분 정도 팔팔 끓인다. 온 집안에 퍼지는 구수한 향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태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 생긴 아침 루틴이다.
매일 아침 보리차를 끓이며 마시는 첫 잔. 그때마다 문득 어린 시절 보리차를 끓이던 엄마의 마음을 생각한다. 내가 매일 따라먹던 보리차 한 잔은 엄마의 사랑이었구나. 아이를 낳고 보니 비로소 젊은 날의 엄마 마음을 마주하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보리차 한 잔에 담긴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배앓이를 안 하길 바라는 마음, 건강히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너를 향한 사랑. 어린 날의 엄마가 그랬듯, 나 역시 오늘도 주전자 가득 그 마음을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