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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못난 글

맛없는 사과로 만든 맛있는 잼

TV 홈쇼핑, ‘사과’

by 서진

나는 공산품이 아니면 TV 홈쇼핑에 나오는 물건을 잘 사지는 않는다.

왜냐고? 자연식품류 상자를 두 손에 받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열었을 때 좋았던 기억이 없다.


모든 제품을 사보진 않았지만, 적지 않은 경험으로 나는 아무래도 보는 눈이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게 됐다.


그런데…. 며칠 전 아무 생각 없이 TV 전원을 눌렀다.

리모컨을 꾹꾹 눌러가며 멍하니 모니터를 보는데 ‘사과, 단단하고 맛있는 사과입니다.’라는 말이 네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단단해?

맛있어?

알맹이도 크다고?


홀리듯 입은 중얼거리고, 리모컨을 누르던 손가락이 멈추더니 리모컨을 TV를 향해 치켜들고 내 눈이 빨려 들어갈 듯 쇼호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냉장고를 열었다.

사과가 하나, 둘, 셋…. 다섯 개, 그러면 연휴가 지나고 저 사과가 집에 도착하면, 딱 떨어지겠네.라는 생각이 스치며 홀린 손이 핸드폰을 자연스럽게 누르고 결재를 끝내버렸다.


맛있다잖아.

단단하다잖아.

알맹이도 크다잖아.

내 손은 셀프 위로라도 하듯 내 머리를 쓰담 쓰담 그리고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래, 사과 하나 사겠다고 저 멀리 있는 마트에 가기 위해, 보일러를 틀고 샤워하고, 차를 타고, 기름때고, 시간 쓰고, 또한 나는 분명히 '요래 왔으니 뭐래도 사야 할 것'이라며 카트에 필요도 없는 물건을 담아낼 것이라는 중얼거림으로 나를 다시 한번 더 달래고 있었다.

연휴가 끝나고 ‘사과’가 도착했다.

상자를 식탁 위에 올리고 상자를 열기 전, 그래 난 자연도 살리고 시간도 아낀 거야. 상자를 열고 실망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회오리칠 때 침을 꼴깍 삼키고,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하하하

사과색이 왜 이래?

이 정도로 작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맛있으면 되지.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수돗물에 깨끗이 씻어 낸 뒤 평상시 먹던 대로 팔 등분을 내고 씨를 제거한 뒤 한입 베어 물었다.

단단해서 껍질이 질긴 거지?

후숙 돼도 한창 되었을 시간인데….

이 날씨에도 사과가 열리나?

왜 익다만 맛이 나지….

아침에 먹은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 그런가?

맛이... 없어

아침에 먹는 사과가 좋다는 말 때문에 먹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사과를 먹기 시작한 후로 화장실이 편안해지고, 달짝지근한 사과 맛에 그리고 입에서 나는 향긋한 향에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는데….


이번 ‘사과’엔 손이 가지 않을 것 같다.

역시 내 TV 홈쇼핑 속 물건을 고르는 안목은 ‘꽝’인 게 확실하다.

자. 자. 당황하지 말고, 이 맛없는 사과를 어떻게 먹을 것인지 생각을 해보자.

멍하니 사과만 바라보았다.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들, 사과 잼이 좋아 아니면 쳐트니가 좋겠어?

답장이 왔다.

무슨 소리예요? 사과로 잼을 만들려고요? 그럼 난 잼.

사과를 꺼내 볼에 담고 깨끗이 씻었다.

또 하나의 볼을 꺼내 물을 담고 레몬 반 개를 물속에 넣고 쥐어짜놓았다.

그리고 사과를 한 개 한 개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손이 저리기 시작하는 것이 한 상자 다 까고 나면 손이 덜덜 떨릴 것 같아, 3분의 1 정도 남겨 열무김치 담을 용도로 즙을 짜기로 했다.


난 집에 사과나 배가 있을 때 즙을 짜서 무즙과 섞어 물 대신 김치에 들어갈 풀을 쑨다. 그럼 설탕을 많이 넣을 때보다 향긋하고 달큼한 김치를 만들 수가 있어, 과일즙을 자주 애용하는 편이다.

껍질을 깎고 씨를 제거한 사과는 색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레몬을 짠 물에 담는다.

마지막 사과 하나를 힘내어 껍질과 씨를 제거하고 레몬 물에 담갔다. 이것이 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적당한 냄비를 찬장에서 꺼내 물을 담고 끓였다. 잼을 넣을만한 용기를 찾아 깨끗이 씻어 팔팔 끓는 물에 소독해 낸 뒤 티타월에 올려놓았다.


냉장고에서 레몬을 꺼내고 테이블 위 과일볼에 담긴 오랜지를 두 개 가져왔다. 이것도 씻어야겠지. 씻은 레몬과 오렌지는 반으로 갈라 스퀴즈(가운데가 볼록 올라온 과일즙 짜는 도구)에 꾹꾹 누르고 돌려 즙을 짰다. 그리고 냄비에 담았다.

레몬물에 담긴 사과 3분의 2를 꺼내 얇게 편으로 썰고 다시 채를 치고 다시 썰어 아주 조그만 조각으로 잘랐다.


손가락뿐만이 아니고 손이 저렸던 데다 오래 서서 사과는 써느라 고생했다. 마트에 가기 귀찮았던 나는 사서 고생하고 있었다.


레몬과 오렌지즙이 담긴 냄비에 아주아주 곱게 썰어놓은 사과를 넣고 설탕을 넣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잼에 들어가는 설탕의 양은 과육 무게의 반정도를 잡아 만들던데, 난 과육무게의 3분의 1이 넘지 않는 선에서 만들었었다. 하지만 이날은 조금 더 넣어야 할 상태인 것 같았다.

설탕 봉투를 들고 더 넣을 것인가 아니면 전에 만들던 대로 할 것인가?

안 그래도 레몬즙에 달달한 오렌지즙까지 넣어 사과맛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잼이 만들어지면 어쩌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맵 돌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설탕을 과육 무게의 3분에 1에 못 미치는 양을 넣고 소금을 약간 첨가.

그리고 약불에서 오랜 시간 조려볼 계획을 세웠다.


냄비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잘 어우러지게 잘 섞고, 시나몬 스틱을 넣은 뒤 냄비 뚜껑을 닫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처음엔 중간 불에 놓고 사과즙이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 부르르르 물기가 나온 소리가 들려 강불로 올리고 끓기 시작하면 재빨리 약불로 줄였다.

그리고 궁금하더라도 절대로 냄비의 뚜껑을 열지 않고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면 성질 급한 날 달래야 했다.

잼이 다 되길 기다리며 난 TV 앞에 앉아 리모컨을 들고 전원을 눌렀다.

그리고 홈쇼핑을 빠르게 지나갔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벌거벗은 세계사’에 버튼을 멈췄다.

친구에게 만들어 줄 호랑이 이모티콘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호랑이 이미지를 찾아보고, 일러스트를 열어 요렇게, 저렇게 마우스를 움직이다 보니 시간이 얼마간 지났나 보다.

진하디 진하게 오랫동안 조려낸 고소한 잼을 통에 담고, 다시 풋 맛을 없애려 오랫동안 레몬 물에 우려 둔 나머지 사과를 얇게 편을 썰고 채를 치고 곱게 다졌다.

이번엔 시나몬 스틱은 넣지 않고 레몬 하나, 오렌지 하나에서 즙을 짜내 곱게 썬 사과와 설탕을 잘 섞어 끓이기 시작했다.

내가 기다렸던 농도까지 조린 사과를 핸드블랜더로 곱게 갈아 용기에 담았다.

뽀얀 요 잼은 빨리 먹을 용. 우리 아들 것.





뽀얀 잼 전에 만든 진한 잼은 단 것을 싫어하는 내가 먹을 것.


그나저나 전에 맛있었던 딸기로 만든 잼도 남았는데, 언제 다 먹나.

올해, 라즈베리와 무화잼은 지나갈 수도 있겠군.



농도 Good, 발림성, 색 내맘엔 듭니다.
요거트를 사다 섞어 먹어야 겠어요.

맛없는 사과라 사과맛이 안 날 것 같지요?

풋맛을 없애고 저온에서 참고 참아 개으른 날 달래고 달래 기다리며 조렸더니 사과 맛이 납니다.


아! 힘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쓰담 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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