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은 힘들어도 맛있습니다
한겨울.
동생들과 ‘이 거리 저 거리 각거리’로 시작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들어간 주문 같은 노래 부르며 다리 빼기 놀이를 했었다. 그러다 술래가 된 사람이 튀어 나가면, 우르르 몰려 따라 나갔다. 네가 술래인지 내가 술래인지는 상관없었다. 우린 내복 바람으로 눈이 하얗게 소복소복 쌓이던 마당을 뛰어다녔다. 우리 집 견공 짱구도 팔짝팔짝 뛰며 우리를 따라다녔었다. 발자국으로 꽃을 만들고, 네 남매는 줄줄이 기차처럼 발자국을 찍으며 헤죽헤죽 걸었다.
엄마가 호족반에 올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고구마와 동치미 그리고 김장김치를 들고, 우릴 부르면 털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휙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갔었다. 동생들과 뜨뜻한 아랫목에 놓인 호족반에 둘러앉아 깔깔댔다. 조그만 손으로 호호거리던 동생을 위해 엄마가 고구마 껍질을 벗겼다. 나도 엄마를 따라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젓가락에 꽃아 동생에게 주었다.
겨울, 고구마에 김장김치를 올려 먹고, 턱턱 막히던 목을 적셔주던 동치미가 생각난다.
그래서일까?
겨울이면 당연한 듯 고구마 한 상자가 거실 한구석을 차지했다. 눈 쌓인 마당엔 김장김치와 동치미가 들어있는 장독이 묻혀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엔 그랬었다.
막 들어선 20대, 한국 사람 한 명 볼 수 없는 영국의 한 지역에서의 첫겨울. 스산한 비가 내리던 겨울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들의 뒤따라 하얀 쌀밥에 김장김치가 그리고 그 김장김치를 올려 먹었던 고구마 생각에 침이 흘렸었다.
지금이라면 한국 마트에서 팩에 들어있는 겉절이와 고구마를 사 왔겠지만, 그때는 먹고 싶은 것 많은 겁쟁이였었다.
그런데 왜 겨울에 생각나지?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고구마가 겨울에 생각난다니 참 모순되지 않는가.
고구마는 신대륙을 찾아다니던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고 다시 중국으로 이어졌으며 그리고 일본, 우리나라는 영조 때 들어왔다고 알려졌다.
고구마라는 식물이 농토 면적을 적게 쓰면서도 수확량이 많다. 또한, 가뭄이나 해충피해에 강한 작물이라 수월하게 키울 수 있어 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구마는 찌거나 구워 먹기도 하지만, 밥, 떡, 술, 조청, 묵, 과자 등 생으로 이용하거나 말려 갖가지 음식에 활용했다. 줄기 또한 서민들의 먹거리로 국이나 찌개, 죽, 나물 반찬에 데치고 무쳐 요리하고 말려서 겨우내 식량으로 사용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사료용으로 사용하여 버릴 데가 없는 식물이었다.
그때부터 고구마는 추운 겨울 서민들의 배를 곯지 않게 해주는 고마운 작물이 되었다.
단지 생고구마는 겨울에 약한 작물이라 나약한 보관공간에서 멍이 들거나 얼어 썩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겨울이 따뜻한 내가 사는 남쪽, 고구마가 유명한 지역이다. 당연히 따뜻한 햇볕을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5월에서 6월에 고구마를 심는다고 한다. 그리고 100일이 지나면서 고구마를 캐기 시작. 그렇다면 지금은 고구마를 기다리며 한창 길쭉길쭉 오동통한 고구마 줄기를 수확해야 하는 시기다.
고구마 줄기로 볶아 먹고, 무쳐 먹고, 장아찌를 담고, 김치도 만들 생각만으로도 식탁이 풍성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고구마 줄기를 수확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
뭐! 일 바지를 입고 엉덩이에 방석 의자를 매달자. 그리고 쪼그려 앉아 줄기를 하나하나 잘라내는 일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늦여름에 독이 올라 풀숲에 숨어있던 모기들. 그것들이 고구마밭에 들어서는 순간,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 전투하듯 매섭게 덤벼든다.
그 작고 가녀린 몸뚱이는 빠르게 내 주위를 날아다니며, 경비행기보다 느린 나의 손바닥 휘저음을 모기는 전광석화로 사방처럼 피해 날아간다. 고구마 줄기 몇 가닥 손에 거머쥐기도 전에 엉덩이는 붉은 점들이 생기고 가렵고 따갑기 시작하면 도망이 최고다.
그물망이 있는 모자가 없다면 절대 고구마밭에 가지 마라.
차라리 로컬마켓에 가서 농민들의 고마움을 느끼며 구매하는 것이 현명하다.
고구마 줄기로 요리하려면 껍질을 벗겨야 한다.
어떤 이는 고구마 줄기에 소금을 뿌려 잠시 기다렸다가 벗긴다고 했다.
물에 소금 한 수저를 넣고 고구마 줄기를 담가두었다 벗기는 이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깨끗이 씻은 고구마 줄기를 삶듯 데쳐, 찬물에 헹궈 식힌 뒤 껍질을 벗긴다고 했다.
어떤 방법을 쓰던 각자에게 쉬운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나는 고구마 줄기를 절대 많이 구매하지 않는다.
봄에는 머위대를 늦여름엔 고구마 줄기를 커다란 고무 대야에 담고 껍질을 벗겼던 기억 때문이었다.
가끔 절에 머물 때가 있다. 며칠이 대부분이지만 때론 일주일, 혹은 한 달, 길면 백일 정도 절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면 당연한 듯 난 하산을 할 때까지 공양간으로 출근했다.
머위대가 올라오고 길쭉하고 오동통해지면 데쳐서 껍질을 깠다. 여름내 먹을 반찬으로 그리고 겨울을 대비할 식량으로 저장하기 위해서였다. 까고 까는 머위대는 줄지 않았다. 어느새 다 깠을까 싶으면 다시 한 가마 데쳐 커다란 고무 대야에 담겨있었다.
고구마 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머위대와 같은 작업을 했었다.
법당에 들어가고 밥 하는 시간 외에는 아주머니들과 죽 둘러앉아 머위대나 고구마순을 손가락이 퉁퉁 물러 터지도록 깠었다.
그런 절이 뭐가 좋다고 때가 되면 찾아가는 내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공양간에서 배우는 요리들도 많고 심신이 안정됨이 좋았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과정이 귀찮다면 마트에서 전처리가 완벽하게 된 연두색 고구마 줄기를 사서 요리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구매한 고구마 줄기가 적은 양이라 전처리 없이 TV를 보며 껍질을 벗겼다.
연두색 뽀얀 살을 들어내는 고구마 줄기 색이 참 예뻐 보였다.
고구마 줄기 요리하기
벗겨낸 고구마 줄기를 데쳐서 찬물에 담가 식혀 냈다.
고춧가루와 액젓으로 볶기도, 소금으로 간하고 곱게 간 들깻가루를 넣어 요리하기도, 된장을 넣어 무치기도, 멸치를 넣어 볶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은 담백하게 새우젓을 넣어 볶았다.
팬을 달구고 들기름 2와 올리브 유 1을 넣고 데운다.
달궈진 기름에 마늘을 넣어 뒤적인다.
여기에 고구마 줄기를 넣는다. 팬을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어 뒤집어 잘 볶는다.
고구마 줄기에 새우젓을 넣는다. 국물 없이 새우맛 넣었다.
고구마 줄기와 새우젓, 각각의 맛을 살리며 어우르기 위해 후추를 넣고 볶아준다.
마지막으로 파를 넣고 한 번 더 볶아준다.
접시에 담아낸다.
참 쉽지요.
남은 고구마 줄기는 냉동실에 넣어둔다.
만들다 보니 고구마 줄기 김치를 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나저나 요즘 나물이 하나씩 늘어가는 냉장고. 다음 나물은 무엇을 해야 할까?
고구마는 조금 더 있어야 맛있어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