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남겨두고 왔다, 콩쿠르 직관으로 얻은 것들, 다시 만난 콩쿠르
# 마음을 남겨두고 왔다
짝꿍은 가끔 '가보고 싶은 나라나 도시를 말해보자'고, 설문조사를 한다. 순간이동하듯이 당장 갈 수는 없어도 짝꿍과 식사를 하면서 누군가의 영상을 보며 간접 여행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무의미한 설문조사는 아닌 것이다. 예전에는 주로 가까운 나라들 - 일본, 싱가포르 - 위주로 답했었다. 그러다가 올해 봄 쇼팽 콩쿠르 예선 영상을 보면서 바르샤바에서 콩쿠르 무대를 관람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더 커졌고, 본선 일정이 가까워지면서 바르샤바가 설문조사 응답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리적으로 먼 곳이기 때문에 직관의 꿈을 현실화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었고, 콩쿠르 본선 기간이 올해 특별히 긴 추석 연휴 기간과 겹치기 때문에 집에서 콩쿠르 본선 라이브 영상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키웠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직관 시도를 결정하여 날아간 바르샤바였다. "바르샤바에 다녀온다고 무엇이 달라질까?"라고 짝꿍에게 되물으며 가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이번처럼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다녀오는 게 좋겠다고 등을 세차게 떠밀어준 짝꿍 덕분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바르샤바에, 마음을 남겨두고 왔다.
화려함과 수수함만으로 바르샤바를 말할 수 없다. 바르샤바는 국가와 민족의 영웅들을 진심으로 기리며 보존하려는 반듯함과 재건의 영광이 동시에 빛을 내는 도시 같았다. 그래서 반짝이는 도시였다. 그들이 지키고 이어가려는 것들을 눈을 더 크게 뜨고 오래오래 살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콩쿠르 직관으로 얻은 것들
1. 좋아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
사회인으로 일을 시작하며 피아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더 깨끗하게 내려놓은 이후에 이렇게 피아노와 쇼팽 음악에 집중하며 몰입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규모의 세계적인 행사에 참여해 보는 것 자체가 낯설어서 어색할 수 있다고 걱정했었는데, 최선을 다해 축제를 즐기는 관객분들을 보면서 신기함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졌다. 돌아온 후 깨달은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는, 피아노와 쇼팽 음악에 대한 애정이 커진 것이다. 현생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의 꿈으로 밀어두고 덮어두었던 피아노를 더 밝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피아노와 쇼팽의 음악을 진심으로 대하는 참가자들과 관람객들을 보면서 나도,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오래 곱씹고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겨울에는 피아노 연습을 다시 해보려고 한다. 다음 콩쿠르 기간 바르샤바 공항 혹은 어딘가에서 한 번은, 누군가의 마음을 잠시나마 쓰다듬어주는 따뜻한 연주를 해보고 싶다.
2. 다음 바르샤바 방문을 기다리는 희망
숙소였던 Chopin Boutique에서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로 걸어가며 점점 익숙해졌던 신시가지 거리와, 무엇을 꼭 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내려놓고 눈길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도 모두 좋았던 구시가지 거리 모두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기억이 조금 희미해졌을 때 다시 방문한다면 그 모습 자체로 좋았던 바르샤바는 어떤 모습으로 맞아줄지 궁금하다. 다음 방문에서는 성 십자가 성당 쇼팽 기일 추모 미사에도 참석해야 하고(!), 쇼팽과 쇼팽의 음악 세계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서 쇼팽박물관의 여러 전시를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3. 되는대로 일단 쓰고 올려보자는 체념과 '살아있다'는 감각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기보다 사실, 내 기억이 휘발되는 게 아쉬워서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문장 하나 능숙하게 잘 쓰지 못하는 글솜씨로 연재가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쇼팽 콩쿠르 본선 무대 참관기와 바르샤바 탐방기는 온마음을 다해서 즐겼던 일에 대한 기록이어서인지 시작이 막막했던 것에 비해서는 연재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 '기록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것은 오랜 기간 품어온 로망이었는데, '제대로'에 신경을 쓰면 잘 써지지 않던 글이 오히려 '되는대로' 일단 쓰고 올려보자고 체념하며 쓰기 시작하니 그런대로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고 발행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브런치북이라는 형태로 정해진 간격과 날짜를 지켜 연재를 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생각하고, 조금씩 글을 짓는 게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지만 반면에 묘하게도,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지난 6월 피아니스트 조성진님 리사이틀 표를 어렵게 구해 공연을 관람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매일 비슷한 일정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일상에서는 '지금 여기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여유조차 없을 때가 많은데, 바르샤바에서 꿈과 같은 쇼팽 콩쿠르 본선 무대를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현실 세계의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브런치북에 연재를 하면서 바르샤바에서 느낀 '현재를 살아가는 감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
# 다시 만난 콩쿠르
11월 26일 수요일, 퇴근 후 부지런히 서울로 이동했다. 짝꿍과 남부터미널역 근처에서 만나 간단히 요기하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바르샤바에 다녀온 지 한 달 반 정도 지났는데, '쇼팽 콩쿠르 위너스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연주회가 열린다고 하여 티켓을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다. 제19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Eric Lu)의 리사이틀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연일 얼마 전에 5위 수상자 빈센트 옹(Vincent Ong)도 무대에 같이 오르게 되었다는 공지와 함께 예매 취소를 원할경우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빈센트 옹의 무대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오히려 좋아!!'였기 때문에 기대감이 더 커졌다.
공연 전부터 에릭 루와 빈센트 옹의 연주회 입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행렬도 어마어마했고, 로비의 북적임과 소란함에서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예매한 합창석 자리에 앉아 공연을 기다리며 무대 쪽을 바라보니 빈자리가 빠르게 사라졌다. 1부는 빈센트 옹, 인터미션 후 2부는 에릭 루의 연주였는데, 우리는 컨디션 난조와 취향의 이유로 1부 빈센트 옹의 무대만 보기로 결정했다. 빈센트 옹이 등장하고 연주를 시작하자 바르샤바에서 본선 1라운드 직관 기회를 잡아 콘서트홀에서 빈센트 옹의 무대를 봤던 날 아침 세션이 떠올랐다. 피아노를 향한 열정과 열망이 너무나 반짝이고 치열해서 누가 무대에 오르든 열심히 박수를 치며 응원했었다. 온몸을 바쳐서 콘서트홀을 가득 채우는 연주를 만들어내던 연주자는 좋은 결과를 이뤄냈고, 돌아와서 우리나라 콘서트홀에서 수상자로 만나니 쇼팽 덕질, 망자 덕질과는 조금 다른 성취감과 짜릿함이 느껴졌다. 쇼팽 작품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슈만 콩쿠르를 우승한 이력만큼 역시나(!) 따뜻한 이불 같은 선율을 만들어내는 슈만 아라베스크(Arabesque) 앙코르 연주에 또 한 번 놀랐다. 오래 입어 너무나 익숙한 옷을 입었을 때 보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내한 공연의 기회가 또 생긴다면, 쇼팽 작품과 더불어 피아니스트가 선택하는 익숙하고 자신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도 선보여주면 좋겠다.
덕분에 2025년이 참 행복했어요. 쇼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