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까지도 보이는 것 같은 울림이 느껴졌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분들처럼 살아가고 싶다

by 생강

# 란하고 아름다운

전날에 이어 쇼팽 콩쿠르 본선 5일 차 아침 세션 직관 기회를 얻었다. 이것으로 바르샤바에 온 이유와 보람은 충분히 채워졌다. 더 이상은 바랄 게 없었다.

조금 흐린 아침이었지만 그 어느 날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필하모닉 홀에 도착했다.

조금 흐린 아침이었지만 그 어느 날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필하모닉 홀에 도착했다. 이틀 전에는 2시간, 전날에는 3시간 가까이 줄을 서며 콘서트홀로 향하는 하얀 계단을 애타게 바라봤었는데, 이날(10월 7일 화요일)은 바로 표 확인과 잠깐의 검문을 거쳐 콘서트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럽에서 꽤 많이 이용되는 티켓 양도 중개 웹사이트에서 좋게 를 구했다. 그러나 주최 측의 방침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도 있고, 극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여라도 사기 거래였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표를 확인받으러 하얀 계단을 오르면서 조금 긴장했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직원이 표의 바코드를 인식하고, "Enjoy!"를 다시 한번 들으니 확실히 안심할 수 있었다.

중앙홀. 다음 라운드 진출자, 수상자 등 콩쿠르의 모든 공지사항은 이곳에서 발표된다.

중앙홀에서 사진을 찍고 다시 계단을 올라 콘서트홀 앞에 도착했다.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전날은 2층 좌석이 머리 위에 놓여있는 1층 뒤쪽 좌석이었고, 두 번째 직관은 앞에서 네 번째 줄 왼편 중간쯤의 좌석이었다. 무대로부터 제법 거리가 있는 뒤쪽 좌석에서도 유튜브 라이브로 들었던 것과는 약간은 다르게 들리는 울림과 압도되는 분위기가, 앞쪽 좌석에서는 떻게 느껴질지 기대도 되고 궁금하기도 했다.

자리에 앉으니 피아노가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이런 자리에 앉아 본선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게 꿈인가 생시인가.' 다시 한번 감격하며 콘서트홀 옆 굿즈샵에서 산 로그램북을 넘겨봤다.

'이런 자리에 앉아 본선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게 꿈인가 생시인가.' 다시 한 번 감격하며 콘서트홀 옆 굿즈샵에서 산 프로그램북을 넘겨봤다.

아침 세션에는 일본 국적의 참가자가 무려 네 명이었고, 그중 우리나라와 일본 이중국적 참가자가 있었다. 일본은 폴란드만큼(!?) 쇼팽과 쇼팽의 음악을 매우 애정하는 나라이고, 지난 대회들의 선 무대에서도 좋은 연주를 보여준 피아니스트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 기대가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 이중국적 참가자(YULIA NAKASHIMA)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쇼팽 콩쿠르 무대에 오르게 된 베히슈타인(C. Bechstein) 피아노를 골라, 참가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피아노¹의 소리를 골고루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기대를 높였다.

아나운서의 세션 시작을 알리는 인사와 심사위원 소개 후 첫 번째 순서의 일본 피아니스트(YUMEKA NAKAGAWA)가 등장하면서 세션이 시작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한 음도 소홀히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섬세한 연주였다. 리가 자리이니만큼 피아니스트의 손과 페달을 쓰는 발이 잘 보였고, 음표까지도 보이는 것 같은 울림이 느껴졌다. 참으로 감사한 기회였다. 번 제19회 쇼팽 콩쿠르에서는 그전까지 항상 압도적으로 다수의 피아니스트들에게 선택을 받아왔던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이어 가와이(Shigeru Kawai) 피아노가 선택을 많이 받았는데, 앞쪽 자리 덕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가와이 피아노는 선명함과 따뜻함을 균형 있게 보여주는 음색²을 가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고 나 혼자 결론을 내려보았다.

두 번째 순서의 대한민국-일본 이중국적 피아니스트(YULIA NAKASHIMA)가 무대에 올랐다. 2009년생의 피아니스트는 퍼프소매의 샤랄라한 드레스처럼 꿈결 같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처음 듣는 베히슈타인 피아노 소리도 피아니스트의 이미지처럼 순수하면서도 심지가 단단하고 담백한 소리로 들다. 피아노 소리를 올바르게 구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와는 매우 거리가 멀지만, 만약 내게 콘서트 피아노 한 대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베히슈타인 피아노도 앞 순위에 두고 고민하겠다는 허무맹랑하고 즐거운 상상을 해봤다.

우리나라 피아니스트들이 대거 무대에 올랐던 전날 아침 세션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정말 기뻤던 만큼, 본선 5일 차 아침 세션에서는 연주자 자체와 연주에서 드러나는 개성이 뚜렷한 덕분에 기억에 오래 남을 무대가 많은 것 같아서 즐거웠다. 특히 말레이시아 국적의 피아니스트(VINCENT ONG, 5위 입상)가 그랬고, 일본 국적의 피아니스트(YUYA NISHIMOTO), 폴란드 국적의 피아니스트(PIOTR PAWLAK, YEHUDA PROKOPOWICZ)들도 그랬다. 이분들 덕분에 이전까지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녹턴과 왈츠가 실은 참 아름다운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연주자의 개성을 작품에 대한 진심과 무한한 정성, 뛰어난 실력으로 맛있게 요리해서 펼쳐 보이는 무대가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마음으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¹C. 베히슈타인(C. Bechstein), 파치올리(Fazioli), 가와이(Kawai), 스타인웨이(Steinway), 야마하(Yamaha)

²이전 대회에서보다 야마하 피아노가 선택되는 비율이 줄고, 가와이 피아노가 선택되는 비율이 당히 높아진 사실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 그분들처럼 살아가고 싶다

눈을 감고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수년동안 익히고 연습해 온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세계적인 콩쿠르 무대에서 실수 없이 보여야 하는 피아니스트들. 다음 라운드 진출에 성공하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 위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집중하는 그 모습 자체가 멋있었다.

그런데 이 음악 잔치에서 본 분들 중 진심으로 멋있어서 닮고 싶다고 생각한 분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으러,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나가며 현재를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을 응원하러, 기꺼이 바르샤바 필하모닉 콘서트홀에 모인 관객분들이다. 특히 직관 표를 사기 해서 줄을 서 있을 때, 콘서트홀 자리에 앉아서 무대를 바라볼 때, 인상적인 분들이 있었다. - 묘하게도, 비슷한 행동을 하셨다 - 한 분은 관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주변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수첩을 꺼내셨고, 다른 분은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자가 등장하기 전에 러 번 접은 종이를 꺼내셨다. 곁눈질로 살짝 살펴보니, 종이에는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들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름 옆에 무엇인가를 표시한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만의 간단한 감상과 함께 다음 라운드 진출에 대한 자신만의 예상을 기록한 것 아닐까.

시간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그다지 이득이 될 것이 없는 행동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분들은 그렇게 쇼팽을, 쇼팽 콩쿠르를 자신의 방식대로 즐기고 계신 것 같았다. 발은 적고 백발이 대부분인 모습으로 보아 나보다는 연세가 많아 보이는 분들이었지만 행동력과 열정은 여느 젊은이들보다도 충만한 분들 같아서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다 생각했다.

분들처럼, 좋아하는 것을 오래오래 마음껏 좋아하면서 살아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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