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민음사
근래 몇 년 사이 나는 삶에서 중요한 일들을 겪었다.
‘중요한 일’이라는 표현은 적절한 표현일 뿐 딱 들어맞는 표현은 아니다. 그 일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나는 아직 그 일들을 말이나 글로 딱 들어맞게 표현할 수 없다. 그 일이 어떤 일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 거리두기를 위한 시간을 거쳤고, 그 시간은 짧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조언이나 설명을 통해 그 일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면 나는 손쉽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알게 되었을 뿐이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며, 자기 직시도 없었을 것이고, 자기 직시를 통한 자아의 깨어짐이나 작은 각성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의 조언도 구하지 않고 내게 일어난 일이 어떤 일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혼자 고투하는 어리석고 미련하며 동시에 치열한 시간을 거쳤고, 그 시간은 내게 적지 않은 뭔가를 안겨주었다.
나는 그 일들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써보았다. 이해하기 전에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뿐 그 일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끝끝내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음. 이것이 개인에게 중요한 일들이 가지는 특징이 아닐까– 말로 조리 있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말하는 순간부터 그 일은 왜곡됐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이 먼저 그 일을 왜곡했고, 듣는 사람은 더욱 더 왜곡해 들었다. 그들은 내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과 말의 뉘앙스로 자신이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드러내보였다.
개인에게 중요한 일일수록 그 일이 품고 있는 의미는 다층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감정으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시고 쓰고 달고 짭짤하고 새콤한 온갖 감정과 해석이 뒤섞여 있어서 하나를 이야기하면 다른 부분은 가려져 결과적으로 왜곡되어 버린다. 하지만 세상은 객관적으로 설명 가능하며 명쾌한 논리를 요구한다. 역설이다.
세계는 단일하지 않다. 드러나 보이는 표면이 있고 이면이 있다. 표면의 세계와 이면의 세계가 중첩되어 있는데, 표면의 세계는 설명 가능하지만 이면의 세계는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 이면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단지 느낄 수 있을 뿐이며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느낄 뿐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말로든 글로든 그림으로든 음악으로든 몸짓으로든.
불가해함, 이해할 수 없음, 아이러니. 이것이 세계의 속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은 이 세계의 불가해함, 이해할 수 없음을 언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시와 소설이 그렇고 희곡 역시 마찬가지다.
오해나 왜곡도 여기서 출발한다.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있는 그대로의 일이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식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곡해야만 비로소 이해 가능해지므로. 그래야만 이 세계가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허공에 뜬 성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고 설명 가능한’, 땅 위에 굳건하게 지어진 성이라고 믿으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잘 느끼고 누군가는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일상적 삶의 졸음으로부터의 탈출’을 거친 사람일수록 더 잘 느낀다.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정신적 침식으로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지만, 모두가 병들었는데 자신이 병들었음을 인식하며 깨어있는 사람이 자신이 병 든 줄도 모르고 졸고 있는 사람보다 현명하고 생기 있다. 느낄 줄 아는 사람, 일상적 삶의 졸음으로부터 탈출한 사람, 생각하는 사람. 그는 세계가 부조리하며 인간이란 그보다 더더욱 부조리하고 자신 자신조차도 부조리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인식의 출발점이다.
한 사람이 있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그는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 이전에는 머리로만 알던 그것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는 사유하기 시작한다. 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게 된다. 이전과 달리 보기 시작한다. 세상은 부조리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삶은 가치 있다. 그는 부조리함에 맞서서 반항할 것이고, 그로 인해 그의 삶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부조리한 삶에 반항할 ‘무엇’을 찾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모습을 바꾸어 놓는 그 무엇’ ‘세련되고 광적인 혹은 신성한 그 무엇’. 그것은 열정 혹은 불꽃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며 부조리한 인간이 가는 길은 삶이 부조리하므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삶에 반항할 무엇, 즉 불꽃을 찾아 불꽃에 복종하면서 죽을 때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의 자유가 있다.
나는 언젠가 내 개인의 서사를 글로 써보고 싶다. 이것은 내게 아주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일들을 겪었는가, 내가 그 일들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그 일들이 어떤 영향을 끼쳐서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되짚고 직시하는 작업은 고통스럽고 감동적일 것이다. 통찰력을 갖춘 거리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그 작업에서 나는 설명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를 세밀하고 적확하게 묘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잘 느낄 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고통을 깊고 예민하게 느끼는 만큼 희열과 영혼의 떨림도 깊게 느낀다. 솟구치는 감동이 자주 찾아든다.
느끼는 것, 그게 전부다. 느낀 것을 묘사하는 것이 창조이고 예술이다.
부조리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묘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통찰력을 갖춘 무관심이다.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의 최종적 야망이다. 과학 역시 그 역설들의 끝에 이르면 제안하기를 그치고 발을 멈춘 채 제 현상의 항상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묘사한다. 그처럼 우리는 세계의 모습들 앞에서 솟구치는 이 감동이 세계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 다양성에서 온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다. 설명은 헛된 것이지만 감각은 없어지지 않고 남는다. 그 감각과 더불어 양적으로 무궁무진한 한 세계가 그칠 줄 모르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술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 시지프 신화 ‘철학과 소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