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살면서 매 순간 느낀다. 처음에는 '설마?' 했고, 다음에는 모른척했고, 마지막으로 그 사실과 마주했다. 바로 자신의 엄마가 되어 달라는 것.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한다. 즉, 남편과 어머님은 매일 만나는 사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자신의 엄마가 되어 달라이야기한다고? 서른을 넘어 중반을 향해가는 남자가 비언어적으로 나에게 표현한다고?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남편을 나의 '연구대상 1호'로 정한 이상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시어머님으로부터 남편의 어린이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 남자가 나에게 어떤 사랑을 기대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시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왜 나에게 엄마가 되어주길 바라는지,어린 시절 남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시부모님께서는 젊은 시절 함께 장사를 하시며 가게를 일구셨다. 때문에 어린 남편과 누나는 이모님 댁을 오가며 살았고,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는 이모(어머님의 다른 여동생)가 집에 함께 살면서 엄마를 대신해 엄마 역할을 해주었다고 했다. 어릴 때 채우지 못했던 마음의 공허함이, 부족했던 감정교류가 결혼을 하면서 나에게 옮겨 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고, 남편이 받고 싶은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남편에게는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공백이 존재했다. 남편과의 이혼을 깊이 고민하던 시절, 후회 없는 노력을 하겠노라고 다짐했었기에, 남편의 다른 면을 들여다보고 채워주고자 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전부가아니다. 받는 사람이 그것이 사랑이라 느껴야 진정한 사랑이 아니던가. 남편은 꼭 아이 같았다. "엄마 나를 봐줘. 나랑 놀아줘. 엄마는 나만 바라봐. 다른 애들이랑은 말도 하지 마."라며 때를 쓰는. 마치 5살의 남자아이처럼.그런 남편에게 그가 원하는 사랑을 전하기 시작했다. 첫 6개월은 나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1년이 지나자 '어, 진심인가?' 3년이 지나자 예민함이 줄어들었고, 남편은 편안해진 듯 보였다. 5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 남편은 자신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삶의 만족도가 아주 높아진 것이다.
나의 지인들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남편과 어떤 유형의 부부 사이예요?".나이 차이에 상관없이, 연인처럼 지내는 부부가 있었고, 오누이처럼 지내는 부부도 있었으며, 친구처럼 지내는 부부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남편처럼 엄마와 아들처럼 지내는 부부도 있었다.그들이 다르게 느끼는 데는서로에게 바라는 사랑, 자신에게채워지는 사랑의 방향성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다른 부부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부럽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현재 상황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 된다. 그것이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아가는 길이니까.
수 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모든 시간들은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나에게 알려주었다.사랑이란, 내가 준 사랑이 상대에게 닿아상대가 사랑이라 느끼는 것. 그때 비로소 사랑이 잘 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고자 하는 사랑이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그것이 상대가 바라는 사랑인지 꼭 들여다 보기 바란다. 10년의 결혼 생활을 보내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이 만족하는 결혼 생활은 없고, 양보 없이는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는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그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주어진 것을 차근차근 살피며, 주어진 것이 당연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고마움은 몰려온다.그 고마움을 말로써 표현할 때, 더 깊은 사랑이 상대에게 전해짐을알아차려야 한다. 서로가 마음을 주고 또 받기를 반복하면 삶에 대한 만족감을 서서히 느끼게 될 것이다. 부디, 고마움을 찾아, 말로써 표현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그로 인해 만족하는 삶을 살아 내시길 응원한다.
오늘의 나의 참견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흔한 착각이 있다. 바로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내 방식대로 사랑을 줄 거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인 사랑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가족들에게 받은 사랑을 통해서 깨달은 사랑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방에게도 그대로 닿아야 진정한 사랑이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랑을 준다. 연인 사이, 부부 사이 그리고 부모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란 상대에게 닿아야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것이다. 상대가 이것이 사랑이라 느껴야만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랑만을 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내가 주고자 하는 사랑과 상대가 받고자 하는 사랑을 함께 생각해 보고, 진정으로 마음에 닿는 사랑을 전하길 바란다.
주변에도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릴 때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부모들이 아이에게 좋은 옷을 사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며, 좋은 곳을 데려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좋은 옷을 더럽혀 오면 "이게 얼마짜린데!" 라며 타박하고, 음식을 흘리며 먹으면,"흘리고 먹지 마라"라고 혼낸다. 좋은 곳에 데려가서도 부모의 속도대로 모든 것을 하려 하고,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이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아이는 좋은 옷, 좋은 음식 혹은 좋은 장소 자체를 바랐던 것이 아닐 것이다. 아이가 진짜 바랐던 것은 엄마 혹은 아빠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고, 같이 놀아주며,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러한 본질을 잊고, 아이에게 대하는 방식에만 집착하게 되는 듯하다.
나는 종종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 받았던 것이 좋았다고 느껴졌다면,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해주려 노력한다. 내가 힘들어도 해낸다. 반대로, 어릴 때 특히 듣기 싫었던 말이나 부모의 행동은 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애쓴다. 마지막으로, 어린 내가 바랐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아이에게 해줌으로써 좀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간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어린 시절 가장 좋았던 것, 싫었던 것, 원했던 것이 어떤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꼭 갖길 바란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은 의외로 소박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