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집 이 씨 세 명이 모이자마자 게임이 시작됐다. 첫 번째 게임은 ‘오목’이었다. 작은아이가 먼저 아빠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잠깐만, 잠깐만!"을 수없이 외쳐보았지만, 결국엔 졌다. 이어서 큰아이가 아빠에게 대결을 신청했지만, 버티고 또 버텨도, 역시 패하고 말았다. 큰아이와 작은아이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고, 체스를 통해 만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떻게 따낸 데이트권인데. 이렇게 쉽게 내줄 리가 있나! 아빠는 "체스 규칙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장기’로 대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큰아이는 매번 ‘장기’에서 대패했던 터라 "No!"를 외쳤다. 결국 두 번째 게임은 시작도 못해보고 무산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두 번째 게임을 고르느라 분주했다. 그 사이, 나는 아빠와 1시간 자유 시간을 갖게 됐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 의견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 나 혼자만의 자유 시간을 얻으려면 내가 남편을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편은 오목을 꽤 잘 둔다는 점이다. 승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크지도 않았다. 결국 큰 반항 없이 남편 옆에 앉기로 했다. 대신 책을 찾아왔다. 나의 역할은 ‘충전기’. 말없이 곁에 있어도 괜찮았다. 읽던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1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띠띠띠, 띠띠띠. 아이들이 안방으로 뛰어 들어온다. 그사이 큰아이와 작은 아이는 동맹을 맺었다. 아빠에게서 엄마를 되찾아 오고자 둘은 필사적으로 ‘동맹’이라는 선택을 했다. 너무나도 비장한 모습이다. ‘부루마블’을 내민다. 부루마블은 아이들에게도 승산이 있다. 작은 아이가 곧 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일에도 일찍 숙제를 끝내면 부루마블을 해왔다. 오늘이 실력을 검증할 절호의 기회다. 드디어 나에게도 탈출(?) 할 기회가 생겼다.
"아빠, 부루마블 하자."
"그럼 두 시간이다. 이긴 사람이 두 시간 엄마랑 보내는 거다."
그래, 이번엔 나도 노려볼 만하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주사위를 던진다. 어라 이게 아닌데. 작은 아이가 자꾸만 나의 도시에 찾아온다. 계속해서 대지료(부루마블 게임에서 다른 사람의 땅에 머물게 되었을 때 지불하는 금액)를 지불한다. 결국 작은 아이가 파산했다. 서울을 두 번이나 걸린 탓이다.(부루마블에서 서울은 머물기만 해도 200만원의 대지료를 지불해야 한다.) 큰일이다. 뒤이어 큰아이도 파산했다. 나의 도시와 아빠의 도시에 번갈아가며 찾아간 탓이다. 아이들이 아빠를 잡아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아이들을 잡고 있다니, 이제부터는 나와 남편의 피 터지는 대결이다. 온 힘을 다해 집중했지만, 손 끝에서 굴려지는 주사위가 문제다. 한 도시만 반복해서 걸리더니, 또 걸렸다. 서서히 판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남편은 나의 도시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간다. 운이 좋다. 끝까지 싸웠지만, 이번 게임 역시 남편이 승리했다. 분하다. 독립투사가 된 듯 끝까지 맞서 싸웠지만, 그 끝은 아쉬운 패배였다. 아이들 눈에서 허무함이 보였고, 전투력을 상실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와의 혈투 끝에, 결국 패배하는 아픔을 맞았지만, 전쟁의 과정은 아이들과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추가해 주었다. 우리의 주말은 이렇게 지나간다.
집안 행사가 없는 일요일에는, 외부 일정을 잡지 않는 편이다. 우리는 쉬면서, 보드게임을 하면서 혹은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아빠의 평일 피로도가 높을 때면, 눈치껏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다. 배드민턴공, 야구공, 축구공, 농구공을 바리바리 챙긴다. 여름도 예외는 없다. 겨울 역시 예외는 될 수없다.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서 기호에 맞춰서 종목이 달라질 뿐, 우리는 계속 움직인다. 큰 아이가 집에서 쉬고 싶다고 하는 어느 날이 있다. 그런 날엔 작은 아이와 단둘이 나간다. 엄마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준다. 어느 날은 작은 아이가 집에서 쉬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 날에는 큰아이와 단둘이 나간다. 엄마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주기도 하고, 쉬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을 때, 계획적으로 한 명의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도 한다. 산책도 좋고, 자전거 타기도 좋고, 공놀이도 좋다.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방식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방식 일 것. 1시간, 2시간이 쌓여, 1년, 2년이 쌓여, 10년, 20년이 쌓여, 아이는 자신에게 스며든 작은 기억과 그 기억의 감정들을 연료 삼아 살아갈 것이다. 아이가 인생을 살아가며 지쳤을 때, 넘어졌을 때 지금의 시간들이 작은 불씨가 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다. 화를 내지 않는 엄마도 아니다. 늘 다정다감하게 아이를 대하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내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주어진 시간도 유한하다. 그래서 행동은 늘 종종거렸고, 마음은 늘 조급했다. 그 종종거림은 결국에 나를 옥죄었고, 그 정도가 심해질수록 나는 평정심을 잃어갔다. 망망대해에서 풍랑을 만난 듯,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더 이상 내가 버티고 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나는 전문가의 이야기에 기대고 싶었다. 그러 던 중 만난 조선미교수님의 인터뷰 내용은 나를 다독여 주는 듯했고, 안심시켜 주었다. 저축을 적게 하고, 인출을 많이 하면 통장에 마이너스가 나듯이, 아이에게 사랑과 지지 그리고 긍정적 감정의 기억을 더 많이 준다면, 혹여 부정적 감정이 아이에게 전해진다 하더라도, 전체 감정은 마이너스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 조건은 부정적 감정이 아이의 마음을 후벼 파는 정도는 아님을 꼭 알아야 한다. 아홉 번 잘하고 한 번 대폭발을 한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결국 실수해도 너무 큰 자책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 기억은 당시의 상황보다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남는 것이니, 아이를 혼낼 때는 되도록 감정을 빼라는 것이다. 그것만 지켜내도 아이는 나의 걱정과는 무관하게 잘 자란다는 것이다. 삶에서 육아, 관계, 역할 등 길을 잃을 때, 관련 전문가들의 인터뷰 영상들을 많이 찾아본다. 전문가들의 인터뷰 내용을 메모하고, 외우고, 전문가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에 대해 고민해 보고, 나의상황과 나의 아이에게 맞게 변형시켜 본다. 아이에게 실천해 보고,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또다시 실천해 보고, 다시 수정하기를 반복한다. 아이는 모두 다르고 부모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전문가들은 나의 아이에 대한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균값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는 평균값을 내 아이에게 맞추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고, 우리가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일 것이다.
오늘의 나의 참견
실수 혹은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꼭 사과를 한다. 말로써든, 편지로 써든. 진심 어린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나에게 남겨진 말들은 공기 중에는 흩어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차곡차곡 쌓이는 법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작은 말들이 마음속 큰 돌덩이가 되어 부서지지도, 없어지지도 않고 자리하게 된다. 우리는 많이 보지 않았던가. 부모, 자식 간의 어려움으로, 부부간의 어려움으로 TV에 출연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이들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작은 말들이, 행동들이 모여 결국 그 단계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지금이라도 깨우쳐야 한다. 나를 돌아보고, 나의 가족을 돌아보고, 나의 배우자를 돌아보고, 나의 아이를 돌아봐야 한다. 내 상처가 더 크다고 알아달라 소리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의 상처 난 마음을 들여다 보고, 나는 상처 주지 않았는지, 무엇이 상대에게 상처였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때 비로소 '가족'이, '집'이 '나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노력 없이 갖게 되는 것은 없다. 그 무엇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미처 사과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나의 아이에게, 나의 배우자 혹은 가족, 친구, 동료에게 용기 내에 사과 해보길 바란다. 미안하고, 미안했다고. 그 한마디가 나에게 가져다주는 효과는 생각 그 이상이다.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