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Oct 11. 2021

읽는 게 기쁠 때

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읽는 게 기쁠 때가 있다. 

개념어로 잔뜩 도배된 어려운 이론서, 육하원칙에 맞춘 딱딱한 기사, 들끓는 감정을 토로하는 글, 어떤 글이어도 상관없이 읽는 게 기쁠 때


모든 글은 '글 바깥', 물리적인 장소는 아니나, 분명 어딘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필자는 그곳을 바라보면서, 뿌리가 물을 빨아올리듯 그곳으로부터 문장을 길어 올린다. 그런 사태를 인식하고 쓰는 필자도 있고, 모르고도 쓸 수 있는 필자도 있다. 그러나 글은 '거기'서 온다. 거기는 '쓰는 순간의 필자'가 유영하는 곳, 비 물리적 장소다.


읽는 게 기쁠 때는 필자의 샘 같은 '거기'에 나도 도달했을 때다. 어떻게 쓰인 글이라도 읽는 데 아무 걸림돌이 없다. 맞춤법이 내가 아는 것과 달라도, 내가 아는 한 비문이어도 상관없다. 틀렸지만 상관없는 게 아니라 틀렸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그게 기쁨일 수 있을까?


첫 자문의 자답은 이렇다. 

필자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그 일은 시작된다. 글은 글쓴이를 드러낸다. 드러나는 사람은 글을 '쓸 때의 그'다. 한 필자의 전작을 읽는 일이 가능한 것은 매 글에서 필자의 다른 '거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딜 지 모르는 '거기'에 대한 기대로 읽기를 시작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필자의 이전 글에 대한 이미지를 장착한 채로 읽기를 시작하면 '거기'에 도달하기에 실패한다. 일단 시작은 이렇다.


그게 왜 기쁜가라는 두 번째 자문에 대해 내가 찾은 답은.... 확장되는 느낌이 주는 감정은 기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는 것. 내가 필자의 '거기'를 경험했다는 기분은 나의 세계 하나가 더 늘었다는 기분이다. 그것은 넓이나 깊이 같은 수치로 환산되는 확장감은 아니다. 글의 '거기'를 엿보고 나올 때마다 나는 또 다른 글의 '거기'도 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나의 읽기 역량이 커진다는 말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역량은 새로운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경험할 수 있을 뿐 얼마큼 큰지 혹은 깊은지는 측정할 수 없다. 이런 기분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읽는 데서 이런 종류의 기쁨을 자주 느끼면, 글 아닌 현실에서도 읽을거리가 많이 생긴다. 주변을 읽게 된다. 세상에서 읽을거리가 자주 발견된다는 것, '감수성'이란 아마 이런 감각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감정은 전이된다. 우는 사람을 보면 울게 되고, 웃는 사람을 보면 웃게 되는 것이 감정의 속성이다. 그러나 감수성은 전염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확장되지 않는다. 


글의 '거기'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열려있지만 모든 독자가 들어가지는 못한다. 기쁨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읽으면서 기쁜 경험을 자주 할 수록 내 주변과 평범한 일상에 대해 더 예민하게 감각하게 된다. 감수성의 확장이다. 


다독多讀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다독이 문제일지 모른다.

정독精讀이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아니다 정독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독자들 각자에게는 넘어야 할 하나씩의 문이 '열려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 쓸 때는 구심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