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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30. 2021

외국 톱모델의 자살 그리고 우울증

소소하게 철학적인

스텔라 테넌트라는 톱모델이 향년 5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한겨레신문의 필자 김도훈은 자신이 겪었던 우울증을 토대로 우울증 환자는 죽음을 선택할 의지조차 사라진 사람임을 증언한다.


많은 자살은 우울증이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무시무시한 인지 변화를 겪는다. 긍정적인 생각 자체가 마음에서 완벽하게 사라진다. 모든 부정적인 기억을 꺼내어 곱씹고 또 곱씹는다. 세상은 곧 절망으로 가득 찬다. 희망은 완벽하게 소멸한다. 많은 우울증 환자가 죽는다. 그건 선택이 아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두뇌의 회로 자체가 어긋난다. 선택은 불가능하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한겨레신문, 김도훈,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의 공허함.... 그는 마지막을 ‘선택’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여름휴가로 간 계곡에서 익사할 뻔한 적이 있다. 만약 우울 증세가 저런 거라면 그때 나는 우울증을 겪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속을 꽉 채운 것이 있었는데 바늘구멍만 한 틈 하나도 없이, 그것을 어둠이라 부를지 혹은 공포라고 해야할 지. 나는 쿠션을 두 팔로 끌어안고 소파 한쪽에 박혀있었다. 식구 중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다해 애원했었다. 말을 걸어달라고 제발 멈추지 말고 말을 걸어달라고. 그렇게 하면 이승의 끈을 놓치지 않을 것처럼, 그래야 어둠에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그러면서 나 자신은 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고 얼마 동안 병든 개처럼 끙끙댔었다. 어떻게 벗어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사를 쓴 김도훈이 그랬듯 운 좋게 빠져나온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었다해도 그와 똑같은 상태가 되풀이된 적은 없다.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우울 증세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초월해있는 것 같다. 고통의 양이 산술적으로 더 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어쨌든 살아있기에 겪는 고통이다. 우울증은 살아서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와 같다. 어떤 깊은 병보다 겪는 사람을 두려움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주변의 그 누구도 같이 사는 식구조차도 그 상황의 심각성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난히 무심하거나 애정 없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세계를 공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울증자를 이해할 수 없고, 위로하고 간병할 수 없다. 


그때 그 당시 할머니와 동생과 언니와... 내 옆을 지나가고 내 옆에 앉아 있고 말을 걸고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무섭다고 많이 무섭다고 그랬지만 그래서 안아주기도 했다가 얘가 왜 이러냐고도 했다가 그랬지만 내가 그들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어떤 말과 행동도 나에게 닿지 않았다. 진공상태의 유리공 안에 갇힌 것처럼 서로가 쳐다보면서도 서로에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안 한 것과 똑같았다.


자살하는 사람은 살기 위해 자살한다고 하는 역설을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죽음의 공포에 장악된 영혼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살한다.


한 종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에이즈로 죽어가던 한 사람의 증언이다.


나 같은 상황에 처하면, 뚜렷한 공포가 찾아와 압도하고 공포에 의해 꿀꺽 삼켜지는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그때 당신의 마음을 가만히 진정시켜야 합니다. 공포가 결코 자신을 죽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저런 공포감은 자신의 마음을 통과해 지나가는 어떤 것일 뿐입니다. 공포감은 생각의 전개 과정으로, 만일 내가 간섭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해소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무서워 보이는 비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은 당신이 아닌 다른 어디로부터 다가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 속에서 유지되어 왔던 온갖 에너지는 풀어지고 있습니다.(『티베트의 지혜』의 부록)


공포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만, 공포에 압도된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죽인다. 


공포는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종교는 공포의 근원지를 찾지 않는다. 오직 공포가 찾아와도 잘 통과해 가도록 공포에 간섭하지 못하게 내 마음을 고요히 갖는 훈련을 권할 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것일지 모른다. 우울 증자의 마음은 공포에 장악되어 있다. 만약 공포가 드리워지지 않은 바늘구멍만한 틈만 있어도 우울 증자는 자살하지 않을지 모른다. 공포로 가득한 내 마음을 들여다볼 바늘구멍만 한 마음만 남아있어도 숨 쉴 수는 있을 것이다. 공포에 장악된 마음은 더 이상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다스릴 마음이 사라진다. 한 치의 의지도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했지만 우리는 우울증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종교의 권고는 균형 잡힌 영양식과 규칙적인 운동의 권고처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기본 지침과 같다.


공포에 장악되지 않기 위한 훈련은 기원전 그리스인들에게도 있었다. 그들은 종교와 다른 방식으로 훈련했다. 공포를 직면하는 연습이다. 그리스인들은 삶에 내재한 비극을 끝없이 상기했으며 매해 축제로 만들어서 죽음의 제의를 지냈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그중 하나이다. 첫 포도를 수확하는 봄에 포도주를 만들어 사흘 밤낮을 마신다.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고독하게 정해진 양(2리터)의 포도주를 마신다. 안락한 집을 벗어나 일부러 굶주리며 길바닥에서 잔다. 여자들은 남편을 떠나 사라지고 제의적 외설을 행한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의식은 잔치와 환희를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의 일반적인 사회 행사와 완전히 반대된다. 참가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엑스타시스(ekstasis) 즉 ‘밖으로 나감’이었다. 일상의 삶 밖으로 나가 묻어두었던 두려움을 마주하고, 두려움을 통과하여 갱신된 삶에 이른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종교가 모든 일을 내 마음의 발로로 보아 내 마음에 콘크리트를 치는 수행의 방식을 가르친다면 그리스인들은 언제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르는 삶의 비극에 대해 마음의 맷집을 기르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미 얻은 병은 영양식과 운동만으로는 치료가 안 되는 것처럼, 종교적 수행이 치료제는 아니며, 엑스터시의 경험 역시 아니다. 그것은 다만 예방책이 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기대는 일일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의학은 우울증 치료제로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그보다 강력한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를 그리고 더 강력한 도파민 촉진제를 발명했다. 자신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 공포로 장악되지 않은 바늘구멍만큼의 틈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런 약물을 통해 우울증을 일시정지 상태로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빛과 어둠이 나눠지지 않듯이 우울증은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어 삶이 실족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무력감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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