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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30. 2021

신해철과 [고스트 스테이션]

소소하게 철학적인 

'대가 없는 고통은 없다.... 모든 고통에는 대가가 주어진다.'


인류가 시작한 이래 이 말이 백 프로 옳았던 때가 있었을까? 오래전 원시인들은 하루 종일 사냥에 애쓰고도 한 건의 수확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아니라면 사냥을 나서기 전 전사들의 안녕과 좋은 사냥감을 위한 제례의식을 치를 이유가 없었을 거다. 


오늘날 임금노동에 대해서는 대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저 말은 옳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맞지 않는 분야도 많다. 긴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도 혹은 글을 쓰고도 보수를 얻는데 혹은 명성을 얻는 데 대부분 실패한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원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대표적으로 대가 없는 노동이다. '자식들 잘 크는 게 대가지, 남편이 바깥에서 성공적으로 밥벌이를 하는 게 대가지'라고 말한다면 그건 낭만적이긴 하지만 너무 가혹하다. 


신화 속의 시지프스를 기억한다. 대가 없는 고통의 대표적 상징이다. 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올리는 고통의 대가는 상이 아니라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가 아니던가. 


모든 고통에는 대가가 주어진다는 말은 그러니까 언제는 맞고 언제는 틀리다. 

 

이건 어떤가. '고통 없이는 대가도 없다. 그러니까 대가를 얻으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앞의 말보다는 진실이지 않은가 싶은데 퍼뜩 떠오르는 건 로또 당첨자다.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의 건물주도 떠올랐다. 


그렇다면 고통과 대가 사이에는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불규칙적이라고 보면 되는 것인가. 인류의 시작 이래로 불규칙적이었다면 저런 말은 어떻게 생겨났고 우리의 현실과도 다른데 우리는 왜 저 규칙을 믿는 편인 것일까? 


'고통에 대한 대가'라는 이상은 아마 물리적 규칙에서 나왔을 것이다. 

도끼를 들어 적정하게 내리치면 통나무가 쪼개진다, 음식을 적정하게 먹으면 배가 부르다, 먹으면 반드시 배설한다. 햇볕이 적정하게 비추이면 꽃이 핀다. 여기서 '적정하게'라고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혼자서는 뭐가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적정하게'는 '관계'를 의미한다. 저런 일은 관계들 속에서만 일어난다. '쪼개지려면' 도끼와 나무가, '배부르려면' 음식과 내가, '꽃이 피려면' 햇볕과 물과 꽃이. 그러니까 저 '술어(행위)'는 반드시 그들 간의 적정함(관계) 아래에서만 달성된다. 


관계는 당사자들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사자들의 시공간, 그들이 지나온 과거, 과거들의 과거들, 인류의 역사... 우주의... 관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한 번도 혼자 존재한 적이 없는 우리 모든 개체들이다. 개체 자체가 이미 개체들이자 관계이다. 


원시 사냥꾼의 노력이 멧돼지의 사냥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는 사냥꾼과 멧돼지의 컨디션과 더위와 숲과 새소리와 발소리와 나뭇가지와 .. 셀 수 없는 이유들이 겹쳐져 있다. 노동자가 동일 시간을 일하고도 동일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 노동 없이도 로또 당첨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관계를 규정하는 무수한 것들 중에 자본주의 경제 체제, 법치주의처럼 인간이 만든 제도들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류는 한 번도 고통에 대한 대가를 꼬박꼬박 받을 수가 없었고 충분하게 받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데 가정해볼 수는 있다. 나는 나일 뿐이야, 독립적이고 자립적으로 살 거야, 나는 자유로운 존재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어떤 모양으로 살까? 


'모든 고통에는 대가가 주어진다. 고통 없이는 대가도 없다.'라는 이 이상적이기만 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이 규칙을 그럼에도 따르며 살 것 같다. 그러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다. '대가 안 받을 테니 고통 주지 마.' '대가 안 받을 테니 간섭하지 마, 내 자유를 침범하지 마.' '고통 없는 대가는 없다고? 알았어. 믿어. 그러니까 고통 주지 마 대가 안 받아.' 


완전히 믿는데 완벽하게 반한다. 


보통 사람이 잘못된 규칙이라고 불만을 토로하고, 믿을 필요가 없다 하고, 규칙이 틀렸으니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살겠다 하고, 그러나 마음대로 산다면서 그렇게 자유롭지도 않아서 짜증 내는 삶과는 다른 삶이다. 사실 보통 사람의 보통의 삶이 가장 저 규칙에 얽매어 있다.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왜 고통을 겪는데 대가가 없느냐고, 누구는 고통도 없이 로또에 당첨되는데. 우연에 의해 결정 나는 걸 가장 싫어하면서도 가장 우연에 기대고 있는 거다. 안 믿는다고 하는데 완벽하게 믿고 있다. 


글로 먹고산다 하는 필자들은 어디선가 글이나 강의를 의뢰받을 때 보수가 얼마인가 묻는 일이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꼭 물어보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겉보기엔 필자들이 대가 없는 고통은 치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치렀으니 대가를 달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고통을 요구하면서도 대가를 안 치르겠다는 쪽이 이상하다.) 필자들은 고통을 안 겪으면서는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는 거다. 고통을 요구받은 필자들은 재능기부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고통을 요구하는 쪽에서 재능기부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여기서 단순한 생활 수칙을 끄집어 내보자. 고통에 대한 대가는 받는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대가는 없다. 불만은 고통을 겪지 않으면서 대가를 기대하는 데 있다. 


만약 고통을 겪으면서도 대가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진해서 고통을 선택했을 때뿐이다. 당연히 그는 대가를 거부한다. 고통을 자기 마음대로 겪기 위해서. 고통의 질과 양을 자유롭게 결정하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죽은 신해철이 혼자 하던 인터넷방송 [고스트 스테이션]을 SBS 라디오에서 해달라고 요청받았을 때 그랬다고 한다. 보수는 안 받을 것이고 [고스트 스테이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사실 이 글은 이것 때문에 시작되었다. 한 TV프로그램을 보는 중에 신해철의 이 이야기가 나왔다.)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이 인디음악을 살렸고 그래서 후배들이 감사를 전하고 등등은 회고적인 관점들일 뿐이다. 


신해철 생전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신해철은 인디음악을 좋아했을 거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프로그램이니 공중파에서 선호하지 않는다 해도 밀어붙였을 거고, 보수를 거부해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자기 맘대로 하겠다고 하면서 보수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뻔뻔함이 없다. 


신해철은 공중파 방송의 어떤 규칙도 깬 바가 없으며 어떤 규칙도 지킨 바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인 나의 자유는 이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규칙을 철저히 너무 철저히 지켜서 규칙이 파괴되고야 마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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