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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30. 2021

매력! 매력이 필요해

이슈로 철학하기

'창조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하여 기독교와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세계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기독교도인 너는 어떻게 할 건지. 그들을 무지하다고 여기고 전도의 대상으로 여길 거니, 아니면 그들을 무시하고 각자 사는 거려니 할 거니? 아마 앞의 것을 시도하겠지? 그런데 앞의 것을 하든 뒤의 것을 하든 너는 결코 세계의 그 부분을 한 치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니? 그 둘은 선택의 두 갈래가 아니라 동일한 한 길이라는 걸?'


비기독교도를 무지하다고 여긴다면 지자(知者)의 입장에서는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게 하는 게 임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을 주고, 잘 곳 없는 사람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슬픔에 빠진 마음을 위로해 주는 마음 아래에 그들을 깨우치게 하겠다는 임무가 있었는가? 전도하는 마음은 특별히 숭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좋은 것을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너도 믿었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평범하다. '내가 좋아하는 강아지를 너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와 조금도 다른 마음이 아니다. 그 마음은 강아지를 싫어하는 마음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배려도 결여한 마음이다.


너는 비기독교도를 그대로 놔두는 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니까, 너만 구원받고 마는 것이니까. 그래서 선교한다고, 선교가 그들을 무시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믿겠지. 그렇지 않다. 선교는 그들을 무시해서 놔두는 것과 똑같이 그들이 가진 관점을 묵살한다. 선교는 그들을 무시한다. 그들을 무시할 수 없기에 너는 그들을 무시한다.


꽤 오랫 철학을 공부했어. 이성과 논리의 학문이니까 신학의 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지. 공부하면서 좌절한 적도 많지만 희열에 들뜰 때도 많았어. 뛰쳐나가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걸 보라고,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가족이 타깃이었어. 그들의 의견과 태도를 하나씩 도마에 올려 이성을 쏘시개 삼고 논리의 칼로 난도질을 하며 그들을 KO시켰어. 내가 좋아했고, 옳았고, 그들도 깨우쳐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하나의 배(船) 라면, 나라는 배 위에 철학이 아니라 만약 신학을 실었다면, 그때의 나는 아마 가장 강력한 전도자였을 거야. 그렇더라고. 네가 하는 짓과 내가 하는 짓이 똑같더라고. 나와 다른 타인을(너에게는 이교도, 비교도겠지) 차마 무시할 수 없어서 결국 무시하고 마는 짓을 내가 하드라.

 

작년에 《알쓸신잡》이라는 프로를 며칠 동안 정주행할 때였어. '말할 때의 유시민'을 좋아했거든. 근데 몇 편이던가, 쉬지 않고 말을 잇는 그를 빤히 쳐다보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유시민이라는 배 위에 기독교를 싣는다면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와 같은 파워를 발휘하겠다. 유시민이 자기의 가치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논리적으로 풀어낼 때 보면 감히 거역할 수가 없을 만큼 빠져들어. 아마 정주행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야. 그 태도가 억압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셀럽들은 일종의 전도자들 같아. 대중 앞에 나서면서 나는 전도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건, 모르고 하는 거짓말일 수도 있고 알고 하는 거짓말이기도 해.


내가 나를 버리고 너에게로 가는 것과 너에게 네 것을 버리게 하고 나에게 오게 하는 것, 이 두 방식 속에서는 누군가 반드시 무시되는 구조가 들어있다. 타인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 타인을 무시한다는 이 모순이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 발동하는 순간 무시도 시작되는 이 모순이 도대체 어디서.


나와 타인, 나의 가치와 타인의 가치가 다름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모순은 시작되었다. 이질적인 것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옮아가고, 이 모순은 한쪽을 발밑에 꿇어 앉히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는 이질적인 것들 밖에 없어. 하나도 같은 것은 없다. 이질적인 것들의 모임을 통칭해서 세계라고 하지, 한 번도 세계가 동질적인 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질적인 것들의 세계는, 나와 타인이 다른 것이 당연한 이 세계는 타인의 가치를 끌어올 필요도 끌려갈 필요도 없다. 이교도를 전도하지 않는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다. 전도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그냥 놔두는 게 아니다. 그냥 놔둬지는 게 그냥 그들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의 존재방식이다. 동질적인 세계를 이상으로 삼는 순간 모순은 발생하고 서로가 서로를 전도해야 하는 싸움판에 들어서게 된다. 세계가 애초에 이질적인데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겠니.


그런데 뒷덜미를 잡는 소리가 있다. '그럼,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서도 안 된다는 거냐? 그럼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라고 하는. 


다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해도 되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뭔지를 말해도 된다. 아무것도 금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해야 한다고 네 근육의 힘을 쓰거나, 자금력을 동원하거나, 지위를 이용하지는 말아라. 만약 네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네가 충분히 나에게 매력적이라면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것을 맛보러 갈 것이다. 너는 그냥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으면 된다. 네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지키면서 살고 있어라. 내가 너에게 갈지 안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네게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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