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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30. 2021

82년생 김지영

소소하게 철학적인


일과 일 사이에 내쉬어지는 짧은 한숨, 그 새를 파고 들어오는 '이쁜' 딸내미의 호출 "엄마~", 인터넷에서 구인란을 뒤적이는 빠른 손놀림, 거리에 나붙은 알바 광고에 멈춰지는 발걸음. 82년생 김지영은 69년생 나의 생활을 카피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건너온 건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최악과는 거리가 먼 남편과 가족들 사이에 있으면서 무엇이 간간이 심호흡을 하게 하는지, 애가 자면 캔맥주 딱 한 개가 왜 그리 급한지, 왜 설거지하다 말고 울컥하고 그렇게 자주 체하는지. 


내가 지금 영화를 보면서 과거를 조작하고 있는 건가?


전국적으로 번지는 미투 운동에 때맞춰 너무나 유명해진 책과 영화였기에 피했고, 안 봐도 뻔할 것이라 생각했고 (물론 뻔했고), 괜히 감정 전염으로 눈물이나 흘리게 될 것이 싫었고, 그런 식의 카타르시스 후에 오는 허탈감도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몇 년 전 개봉 당시까지도 저런 상태에 대해 지금만큼의 거리감을 갖지 못했다. 일을 놓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한 지 십 년을 훌쩍 넘고 딸의 성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는데도. 


회고할 수 있다는 것은 거리가 생겼다는 뜻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 세계에 빠져있지는 않다는 것.  


무엇이 여성을 미치게 하는가.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비상식적인 사람도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도 없다. 모두 이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상이다. 보편적인 가치관, 보편적인 애정관, 보편적인 직업관, 보편적인 여성관, 보편적인 아내관, 딸관, 아들관... 무엇 하나 튀는 것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보편이 누군가에겐 악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여성이라는 이름이다. 자기 인생을 담보로 오빠와 남동생을 뒷바라지했던 미숙, 맏딸 은영, 성공적으로 베이비 시터를 구하고 새 회사를 차린 여성 팀장과, 아직까지 꾸역꾸역 직장에 붙어있는 동료 여성들과 이도 저도 안 돼서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 여성 김지영과 ....


그러나 세대를 불문하고 상황과 처지를 불문하고 여성이 싸우는 대상이 단순히 남성인가? 


오히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부장이 되기를 압박해 온 자본주의적 문명은 아닌가? 

집안일을 굳이 가사 노동으로 인정하라고 주장해야 하는 시대, 상업자본주의가 들어서기 전까지 여성이 집안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가? 우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공평하게 세상에 나가 자신의 꿈을 펼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라고 교육받았다. 이제 능력 있고 돈 있으면 누구에게나 '가부장의 길'이 열려 있다. 그래서 한 정신분석가가 말했듯이 이 세상에는 남성과 남성이 되고 싶어 하는 여성만 있다. 여성도 남성처럼 능력을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어졌다.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명문화되었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사각지대가 있으니 바로 가사와 육아다. 남성과 똑같이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을 주입받고 자랐지만 여성의 출세를 막는 유리천장은 건재하고, 능력과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사와 육아는 끝까지 여성의 몫이다. 바깥일을 안 하는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갈아 넣으면서도 사회가 그렇게 보듯 가사와 육아를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김지영의 정신질환은 욕망을 주입한 사회 그러나 욕망을 펼치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은 사회에 원인이 있다. 원인이 사회라는 것은 원인을 명확히 짚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김지영의 주변 인물 중 누구 하나도 딱히 악인이랄 수 없다. 그런데 여자는 미쳤다. 누구도 죄가 없다면 모두에게 죄가 있다는 뜻이다. 모두의 보편적인 그 삶이 바로 여자의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서야 살아지는 삶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신이 병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여성의 적은 구체적인 어떤 남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남성은 면피될 수 없다. 세상이 변했는데도, 전근대가 근대로, 현대로 변했는데도 남성의 지위와 의무는 일정한 채로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즉 남성은 수천 년 동안 기득권자다.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 있는 남성이라면 그는 바깥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욕망이 있으나 바깥에서도 막히고 집안일도 첩첩이고 그 집안일은 대접도 못 받고 왜 젊은 데 나가서 안 벌고 집에서 애하고 노느냐는 전방위 공격으로부터 온전한 정신을 기대하는 것이 더 비정상적이다.  


김지영의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 아기를 맡기고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이었나? 영화는 김지영이 문예지에 글을 싣고 마치 어릴 적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처럼 마무리되었다. 그 성공이 오직 사회적 성공이라면, 성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성공이 아니라면 그 기쁨은 잠시 진통제를 맞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문예지를 들고 기쁘게 집 안으로 들어선 김지영 앞에 펼쳐질 것들을 우리는 아주 잘 예상할 수 있다. 김지영의 손 길을 기다리고 있는 어질러진 집과 쌓인 설거지 감과 엄마 품을 바라며 두 손을 치켜들고 뛰어 온 '이쁜' 아기다. 기다리는 것들에 하나하나 손길을 나누어주고 난 늦은 밤 맥주를 한 캔 들고 컴퓨터 앞에 김지영은 앉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진통제의 약효는 반드시 떨어진다. 


김지영이 찾은 일이 글쓰기라는 것이 또 왜 이리 슬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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