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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01. 2021

다큐멘터리,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소소하게 철학적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재판이 계속되고 있었나 보다.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례적이라고 보도된 2018년 재판은 나치 친위대의 하급 대원의 죄를 물었다. 그는 폴란드에 있었던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했었다. 이 재판에서 피고인은 "명령대로 따랐을 뿐이다.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했다."라고 진술했다. 


낯설지 않은 진술이다.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 섰던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입에서도 나왔던 말이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이 장교의 입에서 나왔을 때 그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장교는 명령을 받기도 하겠지만 명령을 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음 해 교수형 되었다. 똑같이 진술한 경비병에게는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그는 경비병으로 근무할 당시 아직 미성년자였고 미성년자는 명령 불복종을 결정할 수 없는 나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93세 노인이 된 경비병의 재판은 소년 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아이히만 재판 당시 <뉴요어커>의 특파원으로서 취재에 나섰던 한나 아렌트의 강력한 선언을 기억한다. '악의 평범성'. 무비판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은 평범하고, 이 평범함이 바로 악이라는 선언. 아이히만의 죄는 평범성에 있었다. 즉 따라야 할 명령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렇다면 경비병의 죄목은 무엇인가. 아직 평범할 수도, 생각할 줄도 모른다고 간주된 이 청소년의 죄는? 그의 죄목은 유태인 살인에 동조한 죄, 일조한 죄다. 경비병이 근무했던 폴란드 수용소를 방문한 원고 측 유태인 변호인은 사방이 조망되는 경비초소에 올라가 보며 그곳에 서서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수는 없다고 발언했다. 청소년의 눈이라고 살인의 참상을 모를 수는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어린 경비병이야말로 악 그 자체였을까?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저명한 인터뷰이들은 악을 신체화시키는 사회를 문제시 했다. 나치와 같은 독재 정권이 공포를 이용해서 악을 사회화한다는 견해였다.


다큐멘터리는 다른 예를 하나 더 가져왔다. 1994년 르완다 사태. 이웃해 살던 투치와 후투족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100일 동안 80만 명이 죽었다. 같은 축구팀에서 친구로 지냈던 두 부족의 청년 둘 중 살아남은 한 청년이 말했다. 다른 부족이었던 친구 덕분에 자신과 자기 친구들이 살아남았다고. 인터뷰 후 그 청년은 자기 부족에게 반역자로 낙인찍혀 살해되었다.


르완다 청년은, 평범할 것이 틀림없을 이 어린 청년은 어떻게 죽음의 공포 앞에 굴하지 않고 친구들을 숨겨줄 수 있었을까? 어째서 누구는 악의 사회화에서 제외되는 것일까.


어른임에도 평범한 나는 독일 경비병의 재판을 불편하게 지켜보았다. 내가 경비병이었다면 그와 다르게 행동했을까? 르완다 청년처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 경비병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거나, 운 좋게 경비병이 아니었을 뿐이지 않을까.


신해철의 경우에서도 생각해 보았듯이 자기 처신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사람은 적다. '평범한' 사람은 상황과 조건에 맞춰 결정한다. 그러나 조건은 언제나 변한다. 평범한 사람은 그리하여 악인이 되어도 조건을 탓하고, 천사 같은 일을 하고서도 본인의 덕으로 주장할 수 없다.


아이히만과 어린 경비병이 처했던 조건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들이 법정에서 증언했듯이 그들은 나치 정권의 명령체계 안에 있었고, 더욱이 경비병은 소년 나치 친위대로서 키워졌다. 그들은 그럴 수 있었다. 다만 지금 조건이 변했다. 지금은 유태인의 경제력이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나치 정권은 악으로 판정났다. 이게 조건이다. 알겠다. 조건이 그랬으니 홀로코스트에 가담했고, 지금 조건이 다르니 처벌받을 뿐이다, 그런 자들은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르완다 청년은... 당시의 조건에 반해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그때도 선(善)이었고 조건이 변한 지금도 그는 선이다. 그가 선이다.


그러나 누가 그 어떤 조건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선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어른이든 청년이든, 악한 사회이든 그 반대의 사회이든, '인간적인'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 '자기결정권'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때만 그에 따르는 처벌도, 칭송도 자기 것이 될 거라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다. 조건과 상황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는 대부분 무력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의지는 하나의 힘이고 그것은 언제나 상황에 반하는 힘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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