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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04. 2021

봄(Spring)과 존재와 K와

소소하게 철학적인

봄은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다.


거리는 두꺼운 외투를 벗고 화사한 색깔의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언 땅이 녹고 대지는 촉촉해졌다. 나무는 물이 오르고 연둣빛 잎들이 환하게 빛나고 꽃봉오리는 하나 둘 벌어지기 시작하고. 동물들은 왠지 급히 서둘렀다. 도대체 누가 세상을 이렇게 술렁대게 했는가? 


물증은 없었지만 세상은 모두 '봄 탓'이라고 했다.


봄은 어리둥절했고 억울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뭔가 오해가 생겼을 거라고, 오해가 풀리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봄은 이런 일을 의도하기는 커녕 꿈도 꾸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았고, 의지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사건이 되는 존재가 오직 봄이기만 할까.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공, 돌, 흙, 물, 플라스틱, 유리, 종이, 산소, 미세먼지, 석유, 철, 빨간색, 보라색, 별, B612, 해파리, 말미잘, 개미, 진딧물, 바이러스, 니모, 도리, 호메로스, 오디세우스, 공자, 이순신, 나, 당신, 천국과 지옥, 미국, 방글라데시, 우산 혁명, 그레타 툰베리, 82년생 김지영, 30호 가수, 미나리, 승리호, 노벨상, 가족, 사랑, 자비, 연민, 신념,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 밥그릇, 젤리, 먹방유투버, 오디오북....


이들 중 어느 하나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소문만 들었을 뿐 정말 존재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인물들, 가본 적 없는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있다는 환경지키미 소녀, 보이지 않는 공기들, 상상의 캐릭터들. 존재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될 것 같은 여타의 관념들, 어떤 주의, 색깔, 감정 등등들.


'존재'를, 형체가 있어서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한정하기엔 이 범주 바깥의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과 우리가 그것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신념들은 감각되지 않지만 전쟁을 일으키고 무수한 사람을 죽인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감각되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라  말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면 모두 존재다'라는 말이 더 좋다.


우리의 외투를 벗기고, 나무의 새순을 돋게 하는 '봄'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잘 봤다. 봄 탓이다. 봄은 소송을 당할 만하고, 체포되는 것이 당연하다.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K는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다. 봄의 운명처럼(실은 모든 존재의 운명이다), K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뭔지도 모를 죄로 소송에 휘말린다. 즉 K는 영향을 준 것이다. 영향을 받았겠지만 주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체포되었다.


K가 소송당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 어느 것도 소송당할 이유가 없다.


봄이 소송당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모든 것은 소송당할 수 있다.


『소송』의 K는 죽는다. 존재가 죽는다, 죽음으로서 '죽음'이 존재하게 되었다. '죽음'이 영향을 주는 한 그리고 죽음에 영향을 받는 한 그것은 존재이니까. 누가 죽였든, 스스로 죽었든 상관없다. 왜? 존재함이 이미 능동과 수동으로 가늠되지 않으며(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존재이므로), 수동적으로 죽임을 당하든 능동적으로 스스로 죽든 그것은 존재함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존재이다.


삶도 존재고 죽음도 존재라면 즉 삶과 죽음이 같다면, 카프카는 K를 통해서 존재의 무의미 따위를 말하고 싶던 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존재가 무의미하다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존재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전부의 외부는 없다. 전부 말고도 남은 것이 있다면 전부라고 하면 안 되니까. 따라서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그것은 존재가 의미 있다는 말과 똑같다. 카프카의 괴상한 유머스러움을 떠올리면 더욱이 카프카를 무의미한 존재에 대한 허무감과는 다르게 읽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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